꾀꼬리 선생님
‘꾀꼬리 선생님’ 요즘 나를 부르는 소리다.
이른 봄부터 시작한 구연동화 반에서 얻은 이름인데 들을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아동연극을 하는 선생님은 자연에서 좋아하는 것을 찾아 그것을 호칭으로 쓰겠다고 했다. 나는 언뜻 언젠가 다녀온 문학 기행에서 내 목소리가 꾀꼬리 같다고 말을 해 준 시인이 떠올랐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목소리는 아니다. 다만 음성이 조금 곱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그 명칭을 써먹기로 했다. 꿈나무, 크낙새, 산세베리아, 초록, 백합, 진달래, 삼십여 명 모두 모이면 숲을 이룬다.
지난해 얻은 첫 손자를 안고 그림책을 뒤적이다 나는 문득 어머님 생각을 했다. 지금의 내 모습처럼 우리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조근 조근 해주셨던 시어머님, 성인이 된 딸들은 그 할머니를 그리움으로 기억한다. 나도 손자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는 구연동화(口演童話)다. 인터넷으로 이곳저곳 찾아보니 마침 55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이야기회원을 뽑는 곳이 있었다. 봉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일은 내 생활에 활기를 줄 것이고 자원봉사라는 말이 낯설기만 한 나에게 좋은 기회라 생각되었다.
오십여 년 만에 어깨동무를 하고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노래하며 술래잡기를 하는가 하면, 둥그렇게 둘러앉아 수건돌리기, 빙글빙글 돌다가 의자 뺏기, 편을 갈라 하는 고무줄놀이, 선생님은 우리들의 먼 기억 속에서 동심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같은 뜻을 가지고 만난 사람들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여름, 그야말로 폭염 속을 뚫고 다녔다. 그리고 꼬맹이들이 들으면 재미있어할 이야기를 찾느라 고심을 했다. 지혜와 용기가 담긴 이야기,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이야기, 착한 마음씨 덕에 복을 받는 이야기 등, 백여 편을 섭렵했다. 그중에 우리 팀이 선택한 것은 ‘혹부리영감’이다. 소고(小鼓)에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얼굴을 그려 넣고 주먹만 한 혹을 달았다. 그 혹은 스펀지를 깎아 살구색으로 색칠을 하니 모양이 제법 흡사했다.
이야기는 줄거리로 뼈대를 세우고 이런저런 객담을 섞어 살을 붙이는데, 그때그때 표현이 조금 달라도 용서가 되었다. 일테면 ‘그랬대’ 아니면 ‘그랬지 뭐야’ 할머니가 어린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식이다. 혹부리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어험’ 하는 헛기침부터 해주고 목울대를 눌러 갈라진 목소리를 내준다. ‘으르릉 쾅쾅’ 천둥과 번개가 치는 장면은 동작도 효과음도 커야 한다.
대본을 손에 들고 안개가 걷히는 아침 산을 오른다. 인적이 드문 숲 속에서 마치 연극배우나 된 것처럼 연습을 했다. 봄과 여름을 보내고 초가을로 접어들 무렵 수료증을 받았다. 처음 공연이 있던 날은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였다.
“어린이 여러분, 오늘은 ‘혹부리 영감님’ 이야기를 해줄 거예요”
“네-에”
목청이 터져라 대답을 한다.
50여 명이나 되는 꼬맹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에 반짝이는 눈을 보니 정말 순수함 그 자체다. 혹을 떼는 장면에서는 까르르 웃기도 하고 도깨비가 출현했을 때는 눈이 커지면서 점점 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모든 만물(萬物)의 새싹은 이리도 어여쁜 것인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대하고 보니 귀여운 얼굴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주기적으로 아동 요양병원을 찾아 봉사하는 문우(文友)가 있었다. 이번에는 함께 가서 공연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우리는 흔쾌히 승낙을 했고 두 팀이 참여하기로 하였다.
청정한 가을, 오늘은 약속한 대로 요양원이 있는 강화로 가는 길이다. 하늘은 높고 들판은 황금색으로 일렁인다. 둑길을 따라 하얗게 핀 억새가 반갑다고 손짓한다. 도착한 시간은 오전 열한 시, 고즈넉한 시골 풍경 속에 아담하게 지어진 이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 한쪽에는 이르게 봉사를 온 여고생들이 말간 햇볕 아래 빨래를 널고 있었다. 입원해 있는 아이들은 칠십여 명이라고 했다. 휠체어를 탄 어린이도 보이고 목발을 짚은 아이도 있다. 우리는 이 층에 있는 넓은 강당에서 공연을 했다. 아이들은 재미있다고 손뼉을 치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얹히는 듯 무거웠다. 곧 점심시간이 되었고 아이들 식사하는 것을 돕기로 했다. 나는 십 개월 된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버섯이랑 여러 가지 채소가 섞인 영양 죽을 먹이고 있는데, 뜻밖에도 삼키는 것을 힘들어했다. 유전적인 문제일까 부모의 잘못일까 어린 생명이 너무나 가여웠다.
얼굴은 활짝 피어서 꽃송이처럼 예쁜데 걷지를 못하는 소녀, 아예 앉는 것도 어려워 누워있는 처녀도 있다. 정말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우리를 인솔한 문우를 그들은 엄마라 불렀다. 아이를 안아 주는 것도 자연스럽고 놀아주는 것도 설지 않다. 한 아이는 가끔 집으로 데려가 가족과 함께 지내기도 한단다. 또한, 이곳에는 지속해서 봉사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같은 또래의 장애아를 친구로 삼아 산책을 하는 남학생이 있는가 하면, 종이접기를 함께하는 여학생도 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안도(安堵)의 마음이 생긴다. 묵묵히 봉사하는 사람들, 더불어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
오곡이 익어가는 가을, 오늘의 행보는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석양을 뒤로하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 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이렇다 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는 이 자리가 부끄럽고, 주름살 생긴다고 끌탕을 했던 자신이 또 부끄럽다.
“꾀꼬리 선생님, 안녕,”
“잘 있어, 재미난 이야기 가지고 또 올게”
왜소증에 유난히 몸집이 작은 사내아이를 나는 가슴에 꼭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