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책[Poem]
녹차를 마시며 ---김연수
물오리
2024. 4. 10. 11:33
지리산에서 아홉 번찌고
아홉 번 덕었다는 작설차 한 잔
청백 찻잔에 우려 놓고 창을 여는 아침에
뼈를 녹이는 통곡으로나 풀릴 듯하던 사연
말없이 끌어안고 산 것들의 사는 일을
자락 자락 향기로 피워 내는 산처럼 살고 싶어라
짓무르게 끈적이던 살의 소원
아홉 번 불가마에 구워 옥빛이 서리도록 흰 살로 거듭나
소슬한 고독을 떨치어 두른 백자처럼 살고 싶어라
오뉴월 땡볕에도 녹이지 못한
추운 운명이 품은 뜻 하나 있는 듯 없는 듯 갈무리하고
그저 모양새 버리고 흘러 흘러 때를 얻는
물처럼만 살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