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생각

며칠 전 꿈에서 어머님을 뵈었다.
그분을 생각하면 우선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성품이 어질고 온화하셨던 분. 팔 남매를 매 한번 댄 적 없이 사랑으로 키우셨단다. 키는 작으셨지만 언제나 깔끔하고 단아하셨다. 한복에 연한 스웨터를 걸쳐 입으셨고 가지런히 빚어 쪽진 머리, 어머님 곁에 가면 코티분 냄새가 났다. 조용히 웃기를 잘하셨던 시어머님,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동지섣달 추운 새벽이면 연탄 갈아주시는 어머님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1970년대 갓 시집을 갔을 때 일이다. 긴 쇠막대를 방구들 아래로 넣었다가 꺼내어 연탄을 갈던 때다. 익숙해질 때까지 그렇게 해 주셨다. 아들 여섯에 딸 둘, 며느리까지 열명이 넘는 가족은 안채 바깥채 나누어 살았다. 그야말로 대 가족 살림을 맡아하신 것이다.
어머님은 유난히 솜씨가 좋으셨다. 그 손을 거치면 모든 음식이 다 맛이 좋았다. 명절이 되면 가마솥을 걸고 사골 곰국을 끓이셨고 가족 중에 생일이 다가오면 우리 집은 집안 잔치가 되었다. 주로 돼지고기 양념을 하셨는데 열댓 근은 넘지 않았나 싶다. 살은 살대로 껍질은 껍질대로 나누고 비계는 기름을 내었다. 고추장 양념으로 고기를 재어두시고 김도 참기름 발라 돌돌 말아 놓으신다. 돼지기름을 내는 것은 일 못하는 내가 맡았다. 그 기름은 야채 부침질 할 때 썼다.
어느 해이던가 별이 쏟아질 것 같은 여름밤이었다. 멍석을 깔고 이불 홑청을 손다리미로 다리셨다. 맞은편에 내가 잡고, 그런 날 어머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옛날에 선을 보았다면 나는 시집을 못 왔을 것이야 , 키가 작아서 너희 아버지가 나랑 혼인을 했겠니 " 그 시절 사진만 보고 혼사가 이루어졌다고 수줍게 웃으셨다. 하긴 아버님은 키가 크신 훈남이셨다.
아버님은 검인정 교과서를 취급하는 문방구를 운영하셨는데, 대체로 집안은 여유가 있었다. 첫째 아드님은 카토릭 의과에, 시누이들은 교대, 막내 시동생은 고고학 교수, 그리고 사업, 다들 공부를 잘했고 집안은 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님을 존경했고 하시는 말씀에 거역함이 없었다.
첫 딸을 낳았을 때. 살림밑천이라 하시며 기뻐하셨던 어머님, 쇠고기를 다져 미역국을 맛나게 끓여 주셨던 분, 쌀밥을 국에 말아 두 그릇 먹었던 기억이 난다. 살짝 끼었던 기미도 그때 사라졌다. 쓸고 닦고 유난히 깔끔을 떨었던 젊은 날, 나는 물가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셋째 아기는 물을 좋아하는 물오리 같네." 어머님이 내게 하신 말씀, 그리하여 내 아이디는 물오리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섭사를 향해 너와 아이들 이 건강하기를, 네가 하는 일들이 잘되기를 기도드린다.' 단정하게 내려쓰신 글씨에 금일봉, 어머님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서울로 이사를 온 나에게 주셨던 편지다. 아침이면 조간신문을 읽으셨던 어머님, 어느날 다녀가신 시고모님께서 양반집 규수라고 하셨다. 냉장고가 귀했던 때 어쩌다 밥이 쉬어버리면 농부들의 피와 땀이라고 찬물에 헹구고 또 헹구어 당신만 드셨다. 무엇이든 버리는 것 없이 알뜰하셨고 역정 한번 내시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철없는 나를 조근조근 타 일어 주셨던 어머님, 주신 사랑이 태산이다.
너무도 갑자기 셋째 아들을 하늘나라 보내고 그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 비로소 헤아려본다. 지아비를 잃고 힘들다고 내 마음만 챙겼을 뿐, 그분의 사랑과 보살핌을 살뜰히도 받았음에도 생전에 맛난 것 한번 사드리지 못한 것이 새삼 가슴 아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흐려진다.
" 어머님 ,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이제야 한 말씀 아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