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Essay]

약속과 빈말 - 이제는 말하고 싶다 -

물오리 2025. 11. 26. 03:58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 못하면 빈말이 된다.
     한때는 그 약속들 앞에서 너무 억울해서 밤을 새하얗게 지새웠던 날들도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빈말을 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살았다. 많은 세월을 살아 놓고 요즘은 지난날들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마도 삶을 정리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철없던 시절에 사랑이라는 덧에 걸려 평생 애쓰고 살아왔던 시간들이 쓴웃음을 짓게 한다.
 

  나는 충청북도 음성이 고향이다. 1965년 내 나이 20세, 초등 동창과 오래 연애를 했다. 그 당시 시아버님은 ‘삼우당’이라는 문방 업을 운영하고 계셨고 8남매를 두셨는데, 우리는 셋째다. 위로 형님이 두 분, 그들이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여서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삼 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조금 쉬다가 직장을 갖게 되었는데 보루네오 가구 원목이 들어오는 부산현장이었다. 그곳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큰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나를 찾는다고 해서 가보니 지게차에서 안타깝게도 두 다리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놀란 가슴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 병원 생활을 일 년, 의족을 하는 데 수개월, 그리고 끝내 내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고 결혼을 했다. 사랑이 뭔지, 지금생각해 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 시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고맙다. 배신하지 않고 시집와 주어서, 너는 문구가게 절반을 네게 줄 터이니, 평생 집 걱정 하지 말고 살아라.”라고. 말씀을 하셨다. 옆에 어머님도 그 말씀을 듣고 계셨다.
 

  결혼 생활 9년, 그는 다친 후유증으로 나와 딸 셋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그 후, 나는 딸들이라도 잘 키워보자 단단히 작정을 하고 서울 변두리로 이사를 했다. 가장이 되어 그야말로 옆도 돌아볼 사이 없이 살았다. 그리고 그 후, 아버님과 어머님은 아무 말씀 없이 소천하셨다. 결국 시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그 약속은 빈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딸애들이 대학을 차례대로 들어가고 교육비가 숨 막히게 어려웠다.
   

 애들의 첫 째 큰 아버지는 가톨릭 의대를 나온 의사이시다. 의대를 졸업하고 그분은 결혼과 함께 오하이오 주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애들의 둘째아버지가 아버님이 남긴 집과 가게 터에서 살았다. 그때 애들 교육비가 벅차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줄게 없다는 답이 왔다. 서류를 떼어보니 아버님혼수상태로 계셨을 때 돈을 주고 산 것으로 되어 있었다.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사람은 돈 앞에서 눈이 먼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지금은 그런 일들이 있을 수도 없지만 그 옛날에는 비밀리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나는 딸아이들에게 늘 미안했다.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대책 없이 자식을 낳아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간신히 공부만 시켰을 뿐, 시원하게 뭐 하나 해준 것이 없다. 내가 택한 길이니 어려워도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지만, 아비 없는 환경에서 자란 딸들이 늘 가슴 아프고 더없이 안쓰러웠다. 답답할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 하늘나라에서 당신은 편안 한가’ 묻곤 했다.
 

    내 나이 이제 팔십에 이르러 그동안 가슴속에 큰 덩어리를 안고 살았다. 시댁에서 받은 대접이 너무도 서운했기에, 이제는 묻어 두었던 한스런 이야기를 하나님아버지 앞에 내려놓는다. 그분께서는 내 마음을 다 알고 계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