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책[Poem]

비 ---이형기

물오리 2017. 9. 5. 08:30

 

 

적막강산(寂寞江山)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창가에 머물 때

저버린 일상(日常)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가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자리

타지 않는 일모(日暮)

텅 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정좌(正座)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 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청명(淸明)과 불안(不安)

기대(期待)와 허무(虛無)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린다

,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