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살이

수필[Essay] 2023. 7. 9. 18:05

 
“우리 밭에 가는데 언니도 갈래 유?”
“ 그럼, 나도 가 ”
    옆에 사는 고종 사촌 동생 전화다. 서둘러 모자를 챙기고 편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이십 분 남짓 제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조그만 시골 마을이 보이는데 지동 일구란다.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그 산 아래 380평, 약간 비탈 밭이다. 이곳은 우선 대추나무가 백 여 그루 심겨있고 한쪽으로는 갖가지 푸성귀가 실하게 자라고 있다. 요즘은 오이, 고추, 가지, 호박, 토마토를 따고 파, 옥수수, 아욱, 상추를 뜯는다. 일주일 전에는 감자를 캤고 그 자리에 들깨를 심었다. 올해는 감자가 잘 되었단다. 동글동글 주먹 만 한 감자를 캤는데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일머리를 모르고 거드는 일도 신통찮은데 채소와 열매들은 다 얻어먹는다.
    나는 농사일을 잘 모른다. 다만 동생 내외가 철따라 심고 거두는 것을 따라다니며 보는 구경꾼이다. 가끔 밭이랑 사이에 돋아난 풀을 뽑거나 고구마나 감자를 캐면 바구니에 주워 담는다. 털썩 주저앉아 부드러운 흙을  손 가득 만지는 느낌은 참 좋다. 그리고 모든 것을 키워내는 흙이 고맙다.
   지난해 가을, 대추가 엄청 많이 열렸었다, 묘목을 심은 지 이십 년이 되었다는데 대추알도 크고 달았다. 제부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직장을 다니며 틈틈이 보살핀다. 모든 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탐스럽게도 키워낸다. 가을에 수확하는 들깨는 기름을 짜고 깻묵을 대추밭에 뿌려준다. 내가 이곳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산으로 올라가는 밭 끝자락에 있는 두 그루 밤나무 때문이다. 봄에 밤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알밤을 내어 준다. 풀 섶이나 밭골에 뚝뚝 떨어진 밤을 줍노라면 그야말로 재미가 쏠쏠하다.
 
    나는 사계절 중에 봄을 제일 반긴다. 그것은 만물이 소생하는 철이기도 하지만, 나물 뜯기를 좋아해서 기분 좋게 바쁘다. 삼월 초순이 되면 호미랑 바구니를 들고 중원 군 미원 쪽으로 간다. 넓은 들은 냉이와 씀바귀가 지천이다. 그리고 돌돌 흐르는 도랑가는 돌미나리가 얼굴을 내민다. 이렇듯 시작되는 나물 뜯기는 오월까지 이어지는데 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사월 중순부터다.
    나물 중에 으뜸은 단연 취나물이다. 추운 겨울 땅속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새순들을 보면 너무 예쁘고 신기해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두릅이며 고사리, 대래 순, 머위, 저마다 독특한 향기를 품고 있는데 그 향을 맡을 때면 ‘ 그래, 이것이 봄이야’ 나는 혼잣말을 한다.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된장에 무치면 그 맛 또한 일품이다. 그리고 뜯어온 나무새를 다듬어 데치고 말리면 봄철 마무리가 된다. 
   
   이곳 청주로 이사 온 지 이년이 되어간다. 요즘 나는 어린 시절 많이 하고 살았던 일들을 이곳에서 한다. 아버지 따라다니며 민물 새우를 잡던 일, 어머니랑 산나물 뜯던 일, 언니랑 다슬기 잡던 일, 그 추억들을 늘 그리워했는데 고향땅에 내려와 하나씩 할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 다행히 동생 내외도 취향이 비슷해 나물 뜯으러 갈 때도 나들이할 때도 나를 끼워준다.
    며칠 전에는 괴산 칠성 댐으로 다슬기를 잡으러 갔다. 어머니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갈 때가 제절이라 말씀하셨다. 여울지며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다슬기를 잡는다. 물속에는 피라미가 노닐고 냇물은 내 발을 간질여 주고 간다. 작은 돌을 제치면 다슬기 댓 마리가 붙어 있다. 제법 씨알이 굵다. 반 대접 정도 되는 다슬기를 밤새 해감을 시켜서 아욱국을 맛나게 끓여 먹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속속들이 촌사람이다. 이런 일들이 왜 그리 좋은지 나도 모른다. 아마 시골에서 자란 탓일 게다. 귀소본능, 연어가 태평양 먼바다에 살다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하듯 인간도 그런가 보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시골이 아니다. 다만 내가 촌 동네를 찾아다니며 시골 살이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팔도 강산은 그 어느 곳을 가도 아름답다. 그러나 충청도는 풍광이 빼어나다. 속리산, 월악산, 화양계곡을 자주 찾아 가는데 우람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 운다. 청량한 바람, 청아한 새들의 노랫소리, 돗자리를 깔고 누우면 몸도 마음도 더없이 편안하다. 사십여 년을 타지에서 살고 돌아온 고향 땅, 나를 품어 주는 그 너른 품이 고맙다. 그리고 그간의 고단했던 내 삶이 스르르 녹아버리는 것 같다.
    어느사이 칠월, 나이 들고 나서의 하루하루는 선물이다. 요즘 한 가지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인간의 삶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가족들, 형제들, 이웃들, 그 모두를 좀 더 사랑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으로 일관했던 일들이 후회가 된다.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인 것을 칠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더디 깨닫는다. 남은 시간들은 하고 싶은 일하며 사랑으로 채워 보리라 다짐해 본다.
    우리 예쁜 둘째 딸 덕분에 주님을 영접한지 십 년, 내 삶의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오늘도 주시는 은혜 누리며 산다 .

 한국수필 9월호 발표 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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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