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의 정지용 문학관을 가다


 

    ‘넓은 벌 동족 끝으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가 즐겨 부르는 정지용의 시 ‘향수’ 앞부분이다.  초가을로 접어든 삽상한 바람이 부는 날, 충북옥천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을 찾았다. 


  1996년 원형대로 복원되었다는 생가는 옥천군 하계리에 단출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부엌하나, 안방, 건넛방, 툇마루, 그리고 초가지붕이 정겹다.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항상 문을 열어 놓았다.


  그의 아버님이 한약방을 했을 때 쓰였던 가구가 방 한곳에 그대로 놓여있고, 그 위에 언제 읽어도 좋은 시 한수 걸려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생가 앞에는 깔끔하게 조성된 문학관이 들어섰고, 뜰에는 정지용의 동상이 서있다.  실내로 들어가니 안내원이 반갑게 맞아 준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지용의 모형이 않자있는데,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옆에 앉아 촬영도 한다.  실내에는 작곡가 김희갑씨가 곡을 만들었다는 정지용의 ‘향수’가 박인수의 목소리로 은은하게 들린다.

  전시실에는 지용의 출생과 문학의 발자취가 차례대로 진열되어 있다.  지용연보가 있고 현대시의 흐름과 생전에 그의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1930년대는 시단에 중요한 위치에 올라 ‘청록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발굴했으며, 그 외도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1935년에 발간된 그의 시, 산문, 초간집이 있어 반가웠고, 영상실 에서는 휘문고 영어교사를 역임했던 시절, 이화전문대 교수 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를 낭송해 보는 기기가 문학체험 실에 있어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시인이 된 듯 낭송을 해보아도 좋다.


   정지용의 ‘향수’는 초기 작품 중에도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구체적으로 읊고 있고, 상상으로 그리는 세계가 아니라 자기 살던 고향을 그리움으로 읊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라는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망국의식과 함께 고향을 회복하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한다.   

  

  영문학자이기도 한 정지용은 말의 오묘함을 최대로 구사하는 천재성을 가진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0년대 구인회를 중심으로 동인 활동을 했으며, 사춘기부터 시를 썼다는 그는 일본 사람이 무서워 산으로 바다로 피해 다니며 시를 썼단다.  무엇보다도 일제식민지 시대 민족이 겪는 고통을 인내하며 살아간 지식인의 고뇌를 엿 볼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난 1902년은 조선의 말기로 일본에 의해 국운이 쇠퇴해 가는 시기였다. 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나라를 잃고 일본의 탄압 속에서 어려움이 많았던 세월이었다. 1950년 6 25전쟁이 일어나자 정치 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평양 감옥으로 이감된 후에 안타깝게도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그의 나이 49세였다.   

 

   매년 5월이면 지용제가 있고, 지용 백일장, 연변 지용 시 문학상, 다채로운 행사가 이곳 옥천에서 열리고 있다한다.  생가를 뒤로 하고 돌아가는 길, 그 앞에 여전히 실개천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시 ‘향수’는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실버넷뉴스 남순자 기자   mulori45@silvernetnews.com


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