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젊었을 때 무정하다 소리 간혹 들었지
남자가 그러면 그러려니
여자가 그러면 그럴 리가
그늘 따라 움직이는 마음이 무정인가 싶어
가지 성긴 나무 아래서 게으르게 놀았지

나 나이 들어 다정하다 소리 간혹 들었지
어른이 그러면 그러한가
아이가 그러면 정말 그러한가
뼈를 따라 움직이는 손이 다정인가 싶어
메마른 연인의 등 위에서 철없이 놀았지

나 이제 무정도 다정도 아닌 병에 걸려
백주에 우산 쓰고 앉아 지나는 사람들에게
그래 나 미쳤다 시비나 걸고 싶고
그러다 아는 이 만나면
손잡고 영화나 보러 가자 애원하고 싶고

누군가의 얼굴은 아득하고
누군가의 손은 스산하고
둘이 만나 조용히 등 맞대는 일이 인연이라며
백 살 먹은 현자마냥 눈매가 고와지면 좋겠고

나 오늘 문득 떠올리지
비탈에서 집으로 기운 키 큰 은행나무를
친구들과 도끼로 찍던 날
쇠와 나무를 한꺼번에 정복한 날
잘린 둥치에 서로의 이름을 새겨 넣고
다 함께 함성을 질렀지

아아, 나의 그리운 옛 친구들
누구는 아토피에 걸려 살고
누구는 유토피아를 꿈꾸다 죽고

나 오늘 무정도 다정도 아닌 마음으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친구에게
손편지를 정성스레 쓰노라면
손마다 하나하나
빈 들의 아기 무덤처럼 한없이 슬쓸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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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