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팔십 즈음에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이제 하려 한다.
젊은 아내와 어린 딸들을 남겨두고 떠난 그도 정녕 가고 싶은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고 싶을 때마다 힘들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는 나를 분명 그는 보았을 것이다. 어쩌다 꿈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그리도 반가웠는데, 너무도 짧은 만남은 아쉬움으로 끝나 가슴이 먹먹해 왔다.
1965년 여름, 그가 내게 사랑의 고백을 했던 날은 달맞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밤이었다. 내 나이 20세 그는 21세, 그와 나는 초등동창이었다. 반듯한 외모에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당시 아버님은 검인정 교과서를 취급하는 문구점을 운영하셨고 우리 집보다는 부유한 환경이었다.
그해 가을, 그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를 했고 간간히 편지를 보내왔다. 보고 싶다는 말과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첫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 내 마음은 더없이 기뻤다. 데이트가 있던 날, 수정교 다리에서 아버지와 딱 마주쳤다.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휴가 왔나”
군복을 입은 그가 씩씩하게 거수경례를 하니 엄하셨던 아버지는 얼떨결에 대답을 하신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께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삼 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그가 취직이 된 곳은 시고모님의 아들이 운영하는 보루네오 가구 원목이 들어오는 부산 현장이었다. 근무처로 간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사고가 나서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부산대학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절하듯 주저앉고 말았다. 건강했던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무릎아래 두 발이 절단되어 있었다.
“혼이라도 네 곁에 있고 싶어”
나를 보자마자 건넨 첫마디였다. 무슨 운명의 작란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큰 형님은 가톨릭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으로 계셨는데 바로 이곳 부산병원으로 옮기셨다. 그날로부터 2번의 큰 수술을 받았고 형님의 보살핌으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는 심한 고통에서도 신음소리 한번 없이 이겨내고 있었다. 그리곤 부모님이 주신 몸을 잃어 죄송하다는 편지를 썼다. 치료받을 때마다 입술을 깨물며 참아내는 그를 보며 내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을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함께 하겠습니다.’ 부처님께도 하나님께도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일 년 여의 병원 치료를 마치고 세브란스 재활 과에서 의족을 했다. 결국 극구 반대를 하셨던 내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나는 결혼을 했다. 사랑의 힘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낸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체험했다.
시동생과 함께 간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니 아버님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보이셨다. ‘고맙다. 시집을 와 주어서, 점포 절반을 네게 줄 테니 너는 평생 집 걱정하지 말고 살아라.’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다.
결혼을 하고 보니 집안 분위기가 우리 집과는 사뭇 달랐다. 아버님은 과묵한 성품이셨고 어머님은 어질고 심성이 고우신 분이셨다. 팔 남매를 낳으셨는데 매 한번 댄 적이 없다고 하신 말씀처럼, 오직 사랑으로 키우셨음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집안은 웃음소리와 함께 편안했다.
결혼 한지 일 년 만에 그는 전자기술 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아버님의 배려로 작은 전파사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는 너무 기뻐했다. 그 후 칼라 TV가 처음 보급되면서 ‘금성대리점’으로 점포가 확장되었다.. 휠체어에 앉아 모든 일들을 성실하게 처리했고 삼 년 만에 창고 지을 땅도 구입을 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아침 화장을 하고 차 한 잔을 들고나가니
“ 우리 마누라 참 이쁘다.” 느닷없이 그가 말했다.
“ 이제 알았어요?” 우리는 그렇게 평안하고 행복했다.
자동차를 공업사와 함께 만들어 손수 운전을 했고 기사들과 안테나 다는 일을 지시하며 부지런히 일했다. 그 덕에 딸들과 나는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그러던 12월의 어느 날, 무엇이 탈이 났는지 두드러기가 심했다. 잠자리 들기 전에 약한 봉지를 더 먹었는데 그 밤, 그는 한마디 인사도 없이 가족을 두고 홀연히 떠났다. 약물에 의한 쇼크사라고 했다. 결혼 십 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가장이 되었다.
내가 왜 이 사람을 그렇게도 좋아했는지 가끔 생각을 해 본다. 그는 내가 좋아할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우선 과묵하고 성실함이 좋았다. 어머님의 성품을 닮아 어질고 착해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한 남편이었다. 비록 몸은 불편했지만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정을 지켜준 가장이었다.
내가 결코 그를 따라갈 수 없었던 점은 그동안의 삶에서 두렵거나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을 뿐, 그의 넓은 가슴에 내가 활개 치며 살았던 것이다. 명절이 되면 언제나 나를 챙겨주는 큰 시누이가 올해도 어김없이 일금을 보내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톡으로 보냈더니
“언니 덕분에 셋째 오빠가 행복하게 살다 가셨어요.” 한다.
나는 그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생선가시 발라 밥을 먹이던 모습, 친구들과도 형제들과도 손님들을 접할 때도 그는 잘 웃었다. 인성이 바르고 속이 깊었던 사람, 호쾌하게 웃던 그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혼이라도 내 곁에 있고 싶다고 한 그에게 나도 한마디 들려주고 싶다. 우리는 늘 함께 있었다고,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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