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주제런가 높고 고운 산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조수미의 고운 목소리를 따라 흥얼거렸던 가곡금강산이다.
그 아름다운 산을 정해(丁亥)년 오월에 친구들과 가는 길이다. 38선이라는 선을 긋고 국토가 반으로 토막난지 55여 년,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 그리고 금강산, 산수가 빼어나 불리는 이름이 계절마다 다른 명산을 드디어 찾아가는 것이다. 가깝다는 이유로, 혹여 녹슨 철마가 다시 달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미루었던 곳이다.
화진포아산 휴게소에서 등록을 마치고 오후 3시경 버스는 북쪽을 향했다. 철새들만 넘나든다는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지나 40여 명을 태운 차는 서서히 움직인다. 둥글게 걸쳐있는 철조망이 보이고, 소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민둥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윽고 북측 검문이다. 사람보다는 빨간 줄이 선명하게 박혀있는 제복이 먼저 눈에 띈다. 순간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상잔의 6 . 25, 지금은 아니 계시지만, 인민군이라면 치를 떨듯 두려워하셨던 내 어머니,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공포로 고조되었던 순간들, 그 유년의 기억이 아슴아슴 살아났다. 막상 그들을 마주하고 보니,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기분이 착잡했다. 검열하는 동안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 있고, 촬영 금지며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들었을 때, 역시 이곳은 자유스럽지 못한 곳임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드문드문 엎드려있는 집들은 마치 1960년대를 연상케 한다. 남강다리를 건너 숙소에 들자 해는 하루를 닫으려한다. 창을 열어 밖을 보니 파란 바다와 해금강 호텔이 멀리 보인다. 해변은 고즈넉하다. 산과 바다, 그리고 모래밭, 아무리 둘러보아도 전혀 낯설지가 않은데, 이곳이 그 오랜 세월 내왕이 금지되었던 북녘 땅이던가, 참으로 믿기지 않았다. 적십자주관으로 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도 부모와 형제를 이곳에 두고 그리움으로 애타 하는 실향민이 많다. 분단이라는 현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고성군 온정리- 아침공기는 맑고 쾌청하다. 짙어가는 녹음은 향기를 내뿜는다. 우리는 조반을 서둘러 먹고 비로봉 아래 있는 구룡폭포로 향했다.
“처음 버스에서 내려서 내 손으로 흙을 만져 보았어요.”
“아, 그러셨군요.”
일행 중에 팔순을 넘기셨다는 어른은 이곳이 고향이라 했다. 그분 얼굴에선 감회가 서렸다. 그 마음 밭이야 오죽하겠는가, 이 땅을 밟고도 그리던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수림대, 삼록수, 옥류담, 굽이굽이 비경을 감상하며 산을 오른 지 두 시간, 숨이 턱에 닿았다. 이윽고 구룡폭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환성을 질렀다. 계곡을 울리는 폭포소리와 웅장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그 물은 바위에 떨어져 다시 튀어 오르는데, 어찌나 영롱한지 마치 옥 같은 구슬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높이 74m 아래 못까지는 120m, 이 거대한 폭포는 우리나라 삼대 폭포에 든다하였다. 동해의 구룡(九龍)이 유점사 53불과 싸우다 패하여 이곳에 숨었다는 전설이 있다. 깎아 세운 것 같은 석벽(石壁), 그 끝자락에는 일곱 빛깔 무지개가 걸려있다. 자연이 만들어 내는 절승(絶勝) 앞에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서너 해 전이지 싶다. 덕수궁미술관에서 북한산수 전시회가 있었다. 어느 화가였는지 이름은 잊었지만, 힘차게 쏟아지는 구룡폭포 앞에서 망연히 서있었던 생각이 난다. 그림을 보며 가슴속까지 시원했던 그 느낌, 기억이 생생하다. 바로 이 장대한 폭포를 앞에 두고 화가는 붓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서화가의 붓끝을 떨리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뿐인가, 금강산을 유람하며 신산(神山)의 자태에 감흥 하여 시를 읊은 이가 어디 한둘인가. 그 유명한 ‘흙’의 이광수도 (金剛山 遊記) 한시를 지었다.
구룡이 숨은 뒤로 소식이 끊겼으니,
천지 풍운(天地風雲)이 일 없는 지 오래로다.
구룡연 물결이 움직이니 기다릴까 하노라.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은 변할 줄을 모른다. 선조들의 발길이 닿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다. 구룡폭포의 절묘한 풍광명미(風光明媚)를 가슴에 담고 내려오는데, 목련관 앞에서 처녀아이가 말을 건넨다.
“막걸리 한잔 맛 보시라요. 친구 분들 이래요?”
함께 자란 동무들이라니까 반갑다며 생글 생글 웃는다. 열여덟 살쯤 되었을까, 얼굴은 잘 익은 사과 같았다. 우리는 조그만 탁상에 둘러앉았다. 두부안주에 한잔을 마셔보니 어릴 때 그 맛이라, 아버지 술 심부름하면서 한 모금씩 몰래 마셨던 농주 맛, 우리는 모처럼 추억 속을 거닐었다. 이곳은 분명 수십 년의 세월을 되돌려 놓고 있었다. 골마다 옥수가 흐르고 폐부 속까지 씻어줄 것 같은 맑은 공기, 공해 없는 하늘은 티 없이 고왔다. 양념이 적게 들어간 음식은 담백하여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있어 개운했다.
구룡연 코스 곳곳을 설명 해주는 처녀안내원, 옥류관에서 냉면을 잘라주던 여성종업원,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에 아가씨들, 내가 만난 북쪽 여성들은 동글동글한 미인들이었다. 그것도 얼굴에 손을 대지 않은 천연 미인 말이다. 너도나도 성형이 난무 하는 시대에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삼일 째 되던 날, 만 가지 형상을 하고 있다는 만물상은 아쉽게도 안개에 묻혀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 다시 한 번 찾아오라고 남겨 놓은 거야. 가을에 오면 얼마나 아름답겠니.”
아쉬워하는 나에게 친구는 말한다. 금강산 일 만 이 천봉, 이 기기묘묘한 산을 구경하려면 한 달이 걸린다 하였다. 삼일 동안 외금강 코스를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큰 기쁨이다. 우리는 훗날을 기약했다. 그때는 기차를 타고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귀가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 땅을 떠나며 못내 서운한 것은 민간인을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먼발치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꼬맹이와 그 아이 엄마로 보이는 젊은 아낙이 전부인데 초등학교 일학년쯤 되어 보였다. 초소마다 서 있는 청년들은 가무잡잡한 얼굴에 체격이 왜소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현실은 삶 자체가 궁핍해 보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과연 그 날은 언제일까.
“안녕히, 다시 오라요.” 확성기에서 여자인민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내 가슴 한쪽은 짠하게 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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