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내 인생에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다.

   그것은 흐렸던 나의 젊은 날을 다시 맑음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때로 평범한 일상에서 느닷없이 커다란 전환점을 긋고 간다.  삼십대 중반, 한쪽 날개를 잃은 그 혹독한 시기를 나는 책과 함께 보냈다. 이야기책을 좋아 하셨던 아버지 덕에 쉽게 책을 접하긴 했지만,  급작스럽게 바뀐 환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막막함을 견디기 위한 방편이었다.

  

   자주 서점을 찾았다. 뭔가 실 날 같은 삶의 끈이라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만난 책이 당시 철학 교수이셨던 김태길 교수님의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라는 책이었다.  평범한 일상과 인간의 삶, 그 광대한 분야를 심도(心度) 있게 다루고 있었다. ‘삶이란 어떤 환경에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일이 있다’는 글귀를 읽으며, 희미하게나마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기 시작 했다. 그 책은 나의 소중한 보물로 책장에 꽂혀있다.

  나는 책이라는 창을 통해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동안 책을 가까이했다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은 단 한 가지의 덕목(德目)이다.

   이 십 여년의 세월을 생업에 종사하며 틈틈이 책을 읽었다. 제목이 좋아서 아니면 서문에 끌려서, 혹은 일간지에 소개된 신간을 골랐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엿보기도 하고 그들의 생각을 읽어갔다. 책장을 넘기며 웃고 울고 나도 모르게 내 가슴은 감동으로 파도를 쳤다. 그리고 밑줄을 그었다. 점차 글을 쓴 작가마다 독특한 향기가 있음도 알게 되었고 저마다 색채가 느껴졌다. 아름답고 오묘한 언어에 매료되어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하여 수필가란 이름을 얻은 지 십년이다

 

  어느 해인가 과천 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본관 입구 잔디밭에 큰 사람이 서 있었다.  7척 장신의 사람은 외국작가가 만든 조형물이었다. 그 사람은 미술관을 뒤로하고 먼 산을 바라보며 ‘어-어-어’ 하고 리듬이 섞인 소리를 간헐적으로 내고 있었다.  제목을 보니 역시 ‘노래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노래라기보다는 마치 세상을 향해 하고픈 이야기가 많아 계속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노래하는 사람처럼 세상을 향해 하고픈 말이 많은 것인가.  그때 내 가슴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림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풀어갔다. 딸아이들을 보며 짠한 마음을 썼고 그 아이들을 보며 내 소망을 써 내려갔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름대로 사유(思惟)의 뜰을 거닐며 침묵했다.  한을 풀 듯 가슴속에 고인 물을 퍼냈다.  나의 글이 논픽션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임을 변명하지 않는다.  고인 물을 퍼내면 맑은 물이 고이듯, 내 마음속에 있던 앙금은 퍼 낸 만큼 맑은 물로 바뀌고 있었다.

   사회성이 부족해 편협했던 성격도 조금씩 너그러워졌다. 계절 따라 피는 꽃들, 창밖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들,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인근에 있는 산행으로 하루를 연다. 낙엽을 밟으며 오르는 산은 늘 새롭다.  다람쥐 한 쌍이 겨울 준비를 하는지 부산하다. 나도 계절로 치면 가을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안개가 자욱한 산길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  허나 혼신을 다해 쓴 글이 활자화되면 그 희열이 기쁨으로 이어진다. 

   글감은 일상에서 특별히 경험하게 되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데, 인간의 정이 느껴지는 이웃 이야기, 혹은 따듯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글이 쓰고 싶어진다.  어떤 주제가 정해지면 며칠이고 생각에 잠긴다.  너럭바위에 앉아 혹은 잣나무 사이를 거닐며 글감을 정리한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떻게 맺을 것인가, 그런대로 초안이 잡히면 글쓰기를 시작한다. 

  유머가 있고 위트가 있는 글, 그리고 해학과 품격이 있는 글을 쓰고 싶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이다.  다만 독자가 내 글을 읽으며 한번쯤 빙그레 웃어만 준대도 나로서는 감사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청명하고 맑은 날의 글을 쓰고 싶다. 살아있는 것이 무엇이고 기쁨이 무엇인지, 그것들과 대화하고 싶다. 우리네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이 울림으로 다가오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