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코가 닮았네요. 따님 코가 조금 더 높네요."
여대생인 듯, 처녀들은 딸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며 웃는다. 동그란 얼굴 외에는 꼭 집어 닮은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코가 닮았단다. 일행의 사진을 서로 찍어주고 능선을 향해 오른다.
이곳은 전라남도 보성, 해발 350M고지의 오선봉 녹차 밭이다. 산마다 큰골이 지어 있고, 능선을 따라 가지런히 자란 녹차 밭은 꿈속인 듯 새벽안개에 쌓여있다. 근간에 채취했는지, 웃자란 여린 잎이 나를 보고 웃는다.
"엄마, 이쪽에 서 보세요. 안개와 능선, 구도가 멋있게 잡혀요."
나는 어색하지만 포즈를 취해 보았다. 옆으로 비켜서 한방, 어린애처럼 골 사이에 앉아서 한방, 이 청초한 새벽 풍경을 하나라도 더 담고 싶어 찍고 또 찍는다.
팔월 초 신문에 '자- 떠나자' 란 타이틀로 전면을 채운 녹차 밭, 그 문구는 나를 유혹했다. 보고 싶었다. 지면을 통해서, TV광고를 볼 때마다 신선한 정경이 삼삼했다. 큰딸이 저녁을 먹으며 마침 며칠 시간이 있다고 했다. 지도를 펴놓고 길을 찾아 표시를 하고 운전은 번갈아 하며 가자고 결론을 냈다.
간단한 준비와 함께 동이 틀 무렵, 우리 모녀는 1000리 길 장정에 올랐다. 내심 흔쾌히 뜻을 받아준 딸이 고맙고, 오붓한 둘만의 여행이 기뻤다.
수원을 지나 경부 고속도로 - 회덕분기점,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장마는 소강상태이고, 파란 하늘은 면사포구름을 잔뜩 이고 있다. 장거리 운전에 피곤해하는 딸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주고 나는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호남으로 질주- 광주 도착한 것이 오후 4시, 전라도라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고속도로를 나와 화순에 이르니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오 메, 인자 왔오.' 초행인 나를 보고 던지는 말 같아 웃음이 나왔다. 능주를 지나 보성으로 가는 길은 빨갛게 핀 백일홍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안개가 걷힌다. 성하(盛夏)의 강렬한 햇빛에 녹차 밭이 모습을 드러낸다. 몇 만평이나 될까, 능선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남해의 해풍을 받고 있는 구릉지대, 다습한 기후에 잘자란 녹차 잎은 윤기가 흐른다. 칙벽 나무처럼 생긴 삼나무가 녹차 밭 사이로 우람하게 서있고, 모 광고를 찍었다는 푯말이 모퉁이 에 서 있다.
" 멋진 풍경이네요. 오길 잘했어요. 엄마."
" 그래, 딴 세계 같구나"
단아하게 지어 놓은 정자에 다리를 펴고 누워본다. 산을 뒤덮는 은은한 향기, 어디론가 둥둥 떠가는 것만 같다. 그림을 전공한 딸은 시야에 잡히는 풍경을 스케치한다. 옆얼굴을 바라보니 오뚝한 코가 조각처럼 예쁘다. 언젠가 짝이 생기면 둘째처럼 내 곁을 떠나가겠지, 서둘러 가야함도 분명 한데 오늘의 내 마음은 마냥 행복하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옥과 보다 좋은 신선한 차 보내왔네.
맑은 향기는 한식 전에 따 그런 가
고운 빛깔은 숲 속 이슬을 품었네.
돌솥에 물 끓는 소리 솔바람 소리인양.
자기 잔에 도는 무늬 꽃망울을 토한다.'
고려 후기의 문신 이제현의 시다.
시음장 벽에 걸린 시구를 읽어보고 우리는 나무로 만든 테이블에 앉았다.
"삼분을 기다리시고, 세 번을 우려서 드세요. 녹차를 넣어서 구운 쿠키가 있습니다."
나이는 삼십 후반쯤 되었을까, 다원에서 나온 아낙인데 고운 인상이다. 딸이 따라주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조금씩 음미하며 마신다. 코끝에 스미는 향이 감미롭기 그지없다.
녹차는 7년이 되어야 채취를 하며, 시기는 곡우 전후에 딴 것을 세작(細雀)이라 하여 최상품으로 친단다. 입하 전후에 딴 것은 중작(中雀)이라 하고 발효 정도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눈다. 잎을 덖어서 엽록소를 그대로 보존시킨 녹차, 10 퍼센트 발효하면 청자, 50퍼센트를 발효하면 오룡차, 100퍼센트 발효한 것은 빛깔이 붉어서 홍차란다. 녹차에 맛은 쓰고, 떫고, 시고, 짜고, 단, 다섯 가지의 맛인데 이중에 가장 먼저 닿는 맛은 쓴맛이고 오래 입안에 남는 맛은 단맛이다. 위로는 머리를 맑게 하고 아래로는 소화를 돕는다고 자세히 설명한다.
다도는 도(道)와 통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며 예(禮)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오늘은 쉽게 이해가 된다. 차하면 우선 커피가 떠오르고 나도 커피를 즐긴다. 그러나 이제 생각이 바뀐다. 공기 맑은 산하에서 이슬을 먹고 자란 여린 잎들, 거듭 덖어서 손이 가길 수차례, 정성만큼 향도 깊어 세 번을 우려먹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물을 붓고 여유 자작하게 기다리는 침착성, 차석에서 나누는 정담이야말로 현대인들의 심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지 않을까, 오늘에 이 정경(情景)을 가득 담아 작은 차상 하나를 마련하리라.
-이 땅에 나고 자란 은혜를 생각 한다- 이호신님의 기행문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라는 기행문의 머리글이 생각난다. 나 역시, 아름다운 국토에 태여 남을 감사한다.
"엄마, 우리강산 참 아름답다. 자주 다녀야겠어요."
나는 미소로 답하며 딸 손을 잡고 삼나무 숲을 나왔다. 찌는 듯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마음은 초록으로 물들어 우리는 귀경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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