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 남짓한 녹음실은 밝고 깨끗했다.
책상위에는 녹음기가 놓여있고 의자에 앉으니 편안하다. 헤드폰을 귀에 걸고 마이크를 조절했다. 나는 오늘 책읽기 음성 테스트를 받으러 왔다. 이곳은 경기도 부천에 있는 점자 도서관이다. 건물 안에는 다섯 개의 녹음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지난 초여름부터 벼르다가 아침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얼굴이 동그랗고 안경을 낀 집사님은 기기 사용법과 녹음 할 때의 유의 사항을 꼼꼼하게 설명해주었다.
유리벽 너머에서 ‘큐’ 사인이 떨어지자 은은한 시그널 음악이 흐른다. 나는 되도록 부드럽게 천천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사단법인 사랑 선교회는 장애인 단체로서 장애인 복지 사업을 목적으로 1985년 설립되었고 각종 장애인 재활교육과 복지 사업을 통하여 장애인들이 정상적으로 사회화 할 수 있도록 돕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이곳 소개를 한다. 그리고 도서명과 지은이를 소개하고 끝으로 읽는 사람을 밝힌 다음 책읽기를 시작한다. 종교서적부터 시, 수필, 소설, 책은 낭독하는 사람이 선택을 한다. 나는 류시화님의 수필집 ‘ 하는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한편을 골랐다. 막상 헤드폰을 타고 들리는 목소리는 다른 삶의 음성처럼 낯설었다. 집에서 소리 내어 여러 번 읽어 보았는데도 숨쉬기 조절이 어렵고 된 발음에서 더듬거렸다. 무엇보다 ‘노 프라블럼’ 이란 외국어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녹음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책장을 넘길 때는 잡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목이 잠겨오면 잠시 쉰다. 간신히 한편을 읽고 나니 긴장해서 그런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어 발음이 엉망이고 리을
발음이 분명치 않았다.
녹음결과는 목소리는 괜찮은데 속도가 느리고 너무 낮은 음성이라고 했다. 책을 읽을 때의 목소리는 도레미의 레와 미 중간 음이 좋고, 처진 음성은 듣는 이의 마음까지 처지게 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입을 크게 벌려 발음을 정확하게 해주어야 하고 자기 목소리 높이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삼켜졌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연습을 하다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낭독한 책을 듣고 감동이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 보람을 느끼고 말이야,” 이곳에 살면서 여러 해 봉사를 하고 있는 친구
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다른 사람을 위해 조그만 일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 나이 오십을 넘으면 먼 산을 보는 나이’ 라고 한 임어당의 글이 떠오르며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특별하게 잘하는 일도 내세울 것도 없는데, 내 삶 속에는 고맙고 감사한 일이 많았다. 뭔가 작은 일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따듯해 왔다. 그러나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한동안 고심을 했다. 그때 장애인을 위해 녹음 봉사를 한다는 이 친구가 생각났다.
맹인을 위한 녹음, 그것도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된다했으니 그간 감동으로 읽은 책을 모두 읽어 주리라 했는데, 소리 내어 읽는 일이 뜻밖에 어려웠다.
삼십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아이들 선생님과의 면담이 있던 날인데, 내목소리가 방송인이 되었어도 좋았을 거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어쩌다 음성이 듣기 좋다는 말도 한번씩 듣기는 했다. 그렇다고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직업에 오래 종사하다보니 아무래도 음성이 트였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일로 조금은 자신감을 갖고 도전한 것인데, 서너 시간 여 연습을 했더니 목이 잠긴다. 삼사 개월은 연습기간이 소요되리라, 차 한 잔을 마시고 일어 설 때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녁 9시, TV 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유연한 음성이 들린다. 정확한 발음과 음정, 전문직이라고는 하지만 어쩜 저리도 잘 할까. 나는 비로소 감탄을 했다.
“속도가 느려도 엄마는 해 낼 수 있을 거예요.”
막내의 응원이 고맙다.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차분히 연습하면 할 수 있겠지, 나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성껏 읽는다. 후일 누군가 들어줄 그 사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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