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이 되면 반드시 감상해야 할 꽃이 있다. 산허리와 기슭을 뒤덮고 붉게 물들인 진달래의 만발한 무리를 보지 않고 봄을 보내서는 안 된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소나무들의 파아란 색채에 높은 공간을 미련 없이 양보하고 그 아래 사이사이를 수놓듯 여기도 피고 저기도 피어 있는 진달래의 무리. '금수강산'이라는 찬사를 연상하며 한국에 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어찌 진달래뿐이랴. 가는 곳마다 계절을 따라 온갖 꽃이 피고 진다. 산과 들에는 들꽃이 피고, 공원과 정원에는 재배한 꽃이 핀다. 무슨 꽃이 가장 좋으냐고 묻지 말라. 모란과 장미, 매화와 난초, 목련과 라일락, 들국화와 코스모스 그리고 그 밖에도 무수한 꽃들이 각각 독특한 향기와 아름다움을 자랑하거늘, 굳이 비교하여 우열을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피는 꽃의 우열을 말하기는 어려우나 지는 꽃의 모습에는 깨끗한 것과 추한 것의 구별이 완연하다. 아직도 윤기와 광채를 남긴 꽃잎을 바람에 휘날리며 미련 없이 떨어지는 모습과 이미 시들어서 보기에 흉한 꼴로 매달려 있는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깨끗하게 지든 추한 꼴로 지든 꽃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그것들이 피어 오르는 모습을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다르다. 기분이 쓸쓸하고 허전하다. 가지에 매달린 채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라일락이나 덩굴장미의 모습도 보기에 딱하지만, 하늘하늘 바람에 휘날리는 벚꽃 또는 서부해당화의 낙화 풍경은 더욱 무상을 일깨운다. 그러나 새봄이 되면 또다시 생명력 넘치는 꽃을 피우며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까닭에, 우리의 마음은 가벼운 아쉬움만 느낄 뿐 크게 상하지는 않는다.


2

빼어난 여자의 아름다움은 꽃의 그것보다도 더욱 눈부시고 신비롭다. 막 피기 시작한 흑장미나 반쯤 열린 자목련의 자태를 세밀하게 관찰한 사람은 너무나 탁월한 조물주의 솜씨에 크게 감탄한다. 그러나 뛰어난 미녀의 눈이나 코 또는 입술을 눈여겨 바라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조물주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식물의 세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차라리 눈을 감는다.

그러나 여자의 얼굴이나 몸매를 꽃을 바라보듯 자세히 살펴볼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남의 집 정원에 만발한 꽃을 담 너머로 발길 멈추고 바라보면, 그 집 주인도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며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과년한 딸이나 아름다운 아내의 탐스러운 모습을 외간남자가 뚫어지게 관찰하는 것을 기분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의 정원의 꽃을 욕심으로 바라본다고 의심하지는 않지만, 남의 딸이나 아내의 미모를 바라보는 눈에는 불순한 생각이 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꽃은 한 송이 한 송이 떨어져 있는 것보다도 공간을 꽉 채우고 무리져 있는 것이 더욱 볼 만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은 혼자서 조용히 떨어져 있을 때 한층 귀하게 보인다. 미인 선발 대회의 실황이 중계 방송될 때마다 집 안의 여자들은 다투어 다이얼을 돌리지만, 나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사람이란 남자든 여자든 한 곳에 너무 많이 모이면 그 진가가 흐려진다는 생각을 나는 오래 전부터 가지고 살았다.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는 마음도 아름다울 것임에 틀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마음이 곱지 않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신문이나 주간지에 실리는 기사 가운데는 우리네의 상상을 뒤엎는 가석可惜한 이야기가 허다하다. 아름다운 여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이 땅의 남성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공연한 연대 책임을 자청하기도 한다.


3

아름다운 마음씨는 아름다운 꽃이나 빼어난 미모보다도 더욱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아름다운 행위를 남이 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거나 또는 그런 미담을 들었을 때의 감격은, 아름다운 꽃이나 미녀를 만났을 때의 감동보다도 더욱 깊게 가슴에 사무친다. 아름다운 마음씨가 이토록 고맙고 거룩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마음씨는 아름다운 꽃이나 미녀보다도 그 사례가 희귀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마음씨는 꽃이나 미녀와는 달리 그 생명이 오래 지속되기 때문일까.

꽃은 열흘 붉기 어렵다 하였고, 절세가인의 자태도 세월이 흐르면 주름살 뒤로 사라진다. 사라진 뒤에도 새로운 꽃이 다시 피고 새로운 미녀가 다시 나타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그 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아니니 역시 덧없고 허망하다. 다만 아름다운 마음만은 그 몸이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오래오래 생명을 유지하고 빛을 남긴다.


이 세상에는 꽃과 미녀와 아름다운 마음씨 이외에도 실로 많은 사물들이 존재한다. 그 많은 존재들 가운데는 추한 것도 많고 악한 것도 많다. 그 추악한 것들로 인하여 세상이 온통 어두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추악한 것들 가운데 섞여 있는 까닭에, 꽃과 가인佳人과 아름다운 마음은 더욱 귀하게 돋보인다. 이 세 가지 존재만으로도 세상은 끝없이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났음을 고맙게 여기며 슬픈 이야기들은 애써 잊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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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