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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04 냉이와 씀바귀 by 물오리

 

 



    ‘산허리와 기슭을 뒤덮고, 붉게 물들인 진달래의 만발한 무리를 보지 않고 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우송(友松) 김태길선생님은 ‘아름다운 세상’이란 글에 만발한 진달래꽃을 보며 새봄을 맞이하라 하셨다. 그러나 나는 농촌에서 자라 그런지, 진달래꽃보다는 냉이와 씀바귀를 캐보지 않고, 봄을 보낸다면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서운하다.

   삼월 하순, 앞당겨 온 봄으로 여린 나뭇가지에도 새 눈이 나왔다. 아파트 주변에 산수유, 개나리, 목련, 봄꽃들이 다투어 꽃술을 열고, 봄빛도 찬란하다.  삼동(三冬)을 이겨낸 어린생명들, 하루하루 모습이 다르다.

 

   우리 집에서 안양은 5분 거리다. 한참 예쁘게 나왔을 냉이와 씀바귀가 궁금해, 며칠을 벼르다가 나는 차에 올랐다. 안양으로 가다가 ‘박달동’으로 접어들어 삼십 분쯤 달리다 보면, ‘물왕리’라는 마을이다. 그리 크지 않은 저수지를 안고, 뒤편에는 밤나무가 있는 중간 산이고, 왼쪽으로는 골을 따라 논과 밭이 펼쳐져있는 전답(田畓)이다. 이곳은 내가 봄만 되면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찾아오는 곳이다. 건너편에 낯선 건물 하나 지어져 있고는 지난봄 그대로다. 나는 논두렁길로 접어든다. 가을걷이를 하고 쌓아둔 참깨 단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고추를 따고 뽑지 않은 고춧대 사이에 냉이와 씀바귀가 실하다. 마침 간밤에 내린 봄비로 밭이랑은 마냥 부드럽다. 흙을 듬뿍 떠서, 씀바귀 한 뿌리, 냉이 한 뿌리, 캐보니 향긋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래, 이 냄새야, 이것이 봄 냄새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일 년 만에 맡아보는 향기는 머리속이 개운하다.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봄나물을 캘 때면 나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촉촉한 흙을 만져보는 것도 좋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좋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이 목을 감싸고 둔덕에 앉아 있으면 고향처럼 편안하다. 봄이면 들로 냇가로 함께 하던 동무들, 그리고 정든 산하(山河), 고향이 그리워

   해마다 하는 나만의 행사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 충청도는 내륙지방이다. 이맘때가 되면 냉이, 씀바귀, 달래, 벌금다지, 지칭개, 돌미나리, 그야말로 천지간이 나물이다. 그중에도 어머니는 냉잇국과 씀바귀나물을 자주 상에 올리셨다. 농사를 지으셨던 아버지는 유독 씀바귀나물을 좋아하셨고, 나 역시 들나물을 많이 먹고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봄이었지 싶다. 그날도 대장간 집 딸, 필순이와 바구니랑 호미를 챙겨 나물 캐러 들로 나섰다. 산을 개간해서 일군 끝자락 비탈밭에 냉이와 씀바귀가 많았다. 우리는 재잘거리며 신명 나게 나물을 캐서 바구니에 담고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게서 나오지 못 혀” 

   돌아보니, 호랑이라고 별호가 붙은 키 작은할아버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물 캐는 재미에 보리 순이 뒤집히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거다. 가슴이 철렁했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고, 필순이의 큰 눈은 더 커졌다.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구니를 내동댕이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산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남 서방 딸인지 다 안다.” 

   악을 쓰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꾸중을 들을 걱정에 미적미적 놀다가 해거름에 집에 들어 가니, 바구니는 댓돌 위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물도 좋지만 보리를 망쳐서는 안 되지”

  아버지는 뜻밖에도 웃고 계셨다. 그 아버지 세상 떠나신지 이십여 년이다. 이제는 아버지를 닮아 나는 씀바귀나물을 퍽이나 좋아한다. 어쩌다 몸살이 나도 생각나는 음식은 씀바귀나물과 냉이 국이다. 냉이는 콩가루를 묻혀 된장국을 끓이고, 씀바귀는 살짝 데쳐서, 고추장과 식초, 약간의 설탕, 그리고 갖은 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무치면, 쌉싸래하면서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그것도 금세지은 따끈한 밥과 함께 먹으면 잃었던 입맛을 찾기에는 그만한 음식이 없지 싶다. 

  

  동의보감에 보면 ‘다년초 씀바귀는 성질은 차고 맛은 쓰나, 독이 없다. 오장육부에 나쁜 기운을 제거시켜주고 여름에는 더위를 먹지 않게 해주며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  쓴맛은 위를 자극하여 소화촉진을 돕고 입맛을 좋게 하여 봄의 나른함을 잊게 해 준다’라고 설명이 되어 있으니, 봄이면 찾아오는 춘곤증에 탁월한 식단이라 생각된다.

 

   한참을 캐다 보니 냉이와 씀바귀가 바구니에 가득하다. 질펀히 앉아 쉬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까치 한 마리가 깨 단을 뒤진다. 고개를 연방 쫑긋거리더니 ‘깍깍 까르르’ 노래 한 곡 들려주고 날아간다. 온갖 나물들이 돋아나는 싱그러운 봄, 입맛도 옛날로 돌아가고 마음도 고향으로만 간다. 질그릇처럼 투박해서 뿌리치기만 했던 아버지 손길도, 이제는 가슴 아리게 그립다. 고향이란 나서 자란 곳 별날 것도 없지만, 부모님과 형제가 있었고 유년의 추억이 있는 곳, 고향은 늘 그렇게 가슴 한곳에 남아 그리움으로 미소 짓게 하나보다.

   오늘은 결혼해서 가까이 사는 딸 불러, 씀바귀나물 무치고 냉잇국 끓여 봄나물 잔치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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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