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공기가 청량(淸涼)하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맞는 가을 아침이다. 시흥2동에 있는 호압사(虎壓寺)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이십 여분 올라가면, 잣나무 숲이 나온다. 간간이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 널찍한 평상도 있어, 나는 이곳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요즘은 다람쥐보다는 청설모가 쉽게 눈에 띈다. 평상에 앉아 쉬고 있는데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잣송이다. 반쯤은 까먹고 반쯤은 남아 있다. 얼른 주워 보니 솔 향이 대단하다. 헌데 언제 왔는지 청설모 한 마리가 내 주위를 돌다가 까만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먹다가 떨어트린 녀석인 모양인데 좀처럼 물러날 기세가 아니다, 향기가 좋아 갖고 갈까 했는데, 마치 내놓으라는 듯 끈질기게 나를 보고 있다.
“너는 또 따서 먹어라.” 분명하게 말을 했는데도 통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열매가 떨어진 그 자리에 도로 놓으니 잽싸게 물고 나무 위로 올라간다.
아침햇살과 안개가 만나는 이 숲의 풍경은 청아하기 그지없다. 풀잎에 매달린 이슬과 깨어나는 숲을 보고 있노라면, 몇 해 전에 감동으로 읽은 책 속의 노(老)교수 ‘모리’가 생각난다. 서너 해 전, 유학차 미국에 있던 막내가 추석이라고 보내온 상자에는, 선물과 함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이 들어있었다.
모리 슈워츠, 그는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는 대학교수였다. 1994년 루게릭병을 얻어 더는 강의를 할 수 없을 때, 제자 ‘미치’와의 재회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비록 몸은 굳어 갔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건강했던 교수 모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죽음을 맞는 과정을 열정적으로 들려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둘러싼 지역사회를 위해, 그리고 자기에게 목적과 의미를 주는 일에 자신을 바치라고 제자 ‘미치’에게 말한다.
‘미치’와 ‘모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병이 깊어져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스승님에게 ‘미치’는 묻는다.
“24시간만 건강해 진다면요?”
“산책을 하겠네, 나무가 있는 숲으로 가서, 여러 가지 나무도 보고 새도 구경하면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자연에 파묻히겠네.”
하고 싶다는 일이 몇 가지 더 있었지만, 노(老)교수 ‘모리’는 숲을 그리워했다. 책을 읽은 지 여러 해 되었지만, 나는 숲 속을 거닐 때면 ‘모리 슈워츠’가 생각난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보내는 하루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하루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지금을 소중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현재의 내가 과거와 미래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고, 과거를 생각하면 후회뿐이지요. 지금, 오늘이 중요합니다.’ 불국사 성타스님의 법어가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인데도 우리는 때때로 잊고 산다. 그러므로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을 참으로 소중하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능선을 돌아 하산하는 길에는 FM 라디오 음악방송을 듣는다. 오늘따라 진행자가 내 맘과 똑 같은 끝인사를 한다.
“청명한 가을 날씨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세요. 오늘도 당신 꺼 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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