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승”
인사하는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른다.
나도 웃으며 그를 따라 거수경례를 한다. 우리 동네 삼성산 시흥계곡에 있는 배드민턴구장의 아침풍경이다. 어제 내린 눈으로 산은 눈꽃이 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겨울의 절경(絶景)이다. 까치는 이 눈 속에 무엇을 먹고 사는지 눈가루를 뿌리며 둥지위로 날아든다. 넓은 천막이 처진 이곳은 벌써 장작이 활활 타고 있다. 일찍 나온 회원이 난로에 불을 지펴 주전자에선 물이 끓고 있다. 커피나 혹은 쑥 차를 마시며 이야기가 한참이다.
이곳 회원이 된 것이 십여 년 전일이다. 작은 키에 통통한 몸무게는 여러 가지 증상을 몰고 왔다. 누우면 숨이 찼고 관절이 시큰거렸다. 집요한 편두통도 찾아왔다. ‘아무래도 운동을 해야겠구나.’ 나는 작심을 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혹은 약수터에서 배드민턴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시작을 했다. 공을 능숙하게 다루는 선배들이 코치해 주었다. 라켓을 잡는 법과 공을 다루는 방법, 그리고 난타를 쳐주었다. 멀리 보내는 하이 클리어, 네트를 살짝 넘기는 헤어핀 크로스, 열심히 하는 데도 공을 자주 놓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깨에 힘을 빼고 손목으로 쳐야 하는 데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해가 바뀌면서 나는 게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남녀가 짝을 지어 하는 혼합복식 게임이 있고 같은 성(姓)끼리 짝을 지어 하는 복식게임이 있다. 셔틀콕을 칠 때의 묘미는 찬스 볼이 왔을 때, 빈자리에 꽂아 버리는 스매싱이다. 그 외도 길게 보내고 짧게 넘기고 게임이 시작되면 숨차게 뛰어야 한다. 상대 팀이 우리 페이스에 말려들면 승리는 눈에 보인다. 이론에는 나도 도사다. 그러나 생각대로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내가 받아야 할 공을 놓치고 파트너가 쳐야 할 공을 터치해서 미안해 웃는다.
일 년에 한 번 대회가 열리는데 지난 가을이었다. 8개의 클럽에서 나온 선수가 300여 명, 그날은 동호인들의 잔치였다. ‘사회인 배드민턴 대회’ 상수리나무에 걸어놓은 현수막처럼 남녀노소 함께 어울리는 자리다. 시합은 시작되었고 나는 삼승까지 가서 간신히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것도 파트너 덕분이었다.
“여사님, 은메달 축하해요.”
“예, 감사합니다.”
대답은 그리했지만 좀 민망했다. 사실 나와 같은 무렵 입회한 회원들은 금메달을 목에 건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난히 운동 신경이 둔했다. 어린 시절 운동회 때, 그 흔한 연필과 노트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도 꼴찌만 면할 뿐, 그래서 늘 아쉬움만 남아있었다.
첫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처음으로 열리는 운동회였다. 새벽잠을 설쳐가며 김밥을 싸고 밤도 삶고 점심을 서둘러 장만을 했다. 딸아이의 달리기경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본부석 옆에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저학년 달리기는 처음 순서로 펼쳐지는 매스게임이 끝나고 바로 이어졌다. 드디어 딸아이 반이 달렸다. 출발신호가 울렸는데 웬일인지 딸애가 보이질 않았다. 앞에서 달려온 아이들은 골인했고 출발지점을 살펴보니, 두리번거리며 세상구경 다 하고 꼴찌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모전여전이라더니 엄마보다 더하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집 딸이 꼴찌로 들어오더라고.”
“세상 구경하느라고 그럴 수도 있지 뭐”
옆집 엄마 말에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나는 민망해 또 웃었다.
“남 여사가 12년 만에 은메달을 땄지 아마”
“예, 맞습니다.”
80을 넘기신 노장은 내 운동 실력을 알고 있는 터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이 어린 후배가 그런 말을 했다면 뭐라고 한마디 했을 터인데 둔해서 그런 것을 인정할 수밖에. 남들은 날렵하게 잘도 하는데 타고난 것이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체중도 줄고 숨찬 증세도 없어져 지하철역 계단도 문제없다. 그뿐만이 아니라 서너 게임을 하다 보면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단박에 사라진다. 그리고 이제는 봄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사계에 묻혀 산다.
산에서 내려오며 길동무에게 한 말이다.
“내가 둔하긴 하지, 좀 부끄럽더라고”
“괜찮아, 메달 좀 늦게 따면 어때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긴 인생을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자신을 위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또 한 번 나를 위로하며 깍깍대는 까치의 인사를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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