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과 사위
‘수 정교’ 다릿목을 지나면 긴 둑길이 나온다.
노란 달맞이꽃이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실바람에 박하향이 묻어온다. 소나기가 시원하게 퍼붓고 간 저녁, 풀숲엔 반딧불이 반짝인다. 입대한 그가 첫 번째 휴가를 온 날이다. 그의 손엔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 하였던가, 눈 감으면 어제 일처럼 선연한데 세월은 아득히도 나를 데려다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늦게 귀가한 딸들이 아무 데나 던져버린 꽃다발이 눈에 띈다. 고운 색으로 물든 한지에 빨간 장미 한 송이, 하얀 안개꽃에 노란 프리지아, 그리고 연보라 튤립에 예쁜 리본이 매여 신장 위에도 식탁 위에도 놓여있다.
“좋은 때다. 내게도 가슴 설레던 시절이 있었지”
나도 모르게 주절거리며 꽃병을 찾는다. 어느 해인가 딸애가 내놓은 사진 속에는 몸집이 가냘프고 키만 밀대같이 큰 사내아이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이 몸으로 처자식 건사하겠니?”
대수롭지 않게 대꾸를 했는데 삼 년쯤 지났을까 느닷없이 인사를 왔다. 그동안 학교를 마치고 군 복무 중이란다. 짙은 눈썹에 적당한 콧날, 이목구비가 수려하다. 사진과는 달리 체격도 늠름하고 당당하지 않은가. 뉘 집 아들인지 볼수록 잘 생겼다.
“안녕하십니까?”
건장한 체격에 얼룩무늬 군복이 한결 믿음직해 보인다. 웃음 짓는 얼굴에는 선량함이 엿보이고 어찌 된 일인가 낯설지가 않다. 딸 중에 유난스럽게 까탈스러워 적이 걱정을 했던 터에, 진중하고 심덕(心德) 있어 보이는 상대가 생기다니 딸만 키운 나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꽃다발은 몇 번이나 안겨주었고 어떤 묘법을 썼는지, 마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아니하다.
“어머니, 혜원이를 사랑합니다.”
그래, 사랑이란 말처럼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 또 있을까, 카키색의 젊음 앞에서 주책없이 나는 지난날의 내 사랑을 회상한다. 더없이 지순하고 청명했던 시절, 반딧불이 불을 밝혀 주고 달맞이꽃이 피던 밤, 나는 그 밤을 잊지 못한다. 온 세상 모두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고 했던 그, 그 환희(歡喜)의 얼굴을 다시 보고 있다. 그것은 기쁨 그 자체였다. 사랑만이 창조할 수 있는 순수의 얼굴이다. 딸아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이해하고 감싸줄 것 같은 넉넉함이 청년의 온몸에서 배어 나온다.
태어남(生) 이란 얼마나 큰 기쁨인가, 하물며 수많은 사람 중에 인연이 되어 사랑함에야 더한 축복이 있겠는가, 지나간 시간 속에 담겨있는 기쁨의 조각들은 내 마음의 보석이 되어 언제나 나를 미소 짓게 한다. 흔히 사랑은 콩깍지가 씌워야 하고 결혼은 한쪽 눈을 감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사랑 없이 우리네 삶이 어찌 이어질 수 있을까, 아끼고 다독이고 상대를 위한 끊임없는 배려로 우리는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다. 그것은 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소유하는 일이리라.
며칠 전, 커다란 꽃바구니가 배달되었다. 핑크빛 카네이션에 하얀 백합, 그리고 빨간 장미가 소담스럽게 담겨 있었다.
‘어머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카드 속에 쓰인 글이다. 혼자 중얼거린 소리가 건너갔지 싶은데, 그래도 얼마 만에 받아보는 꽃인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요즘 내가 새삼 느끼는 것은, 딸에 대한 나의 사랑도 사랑이려니와 딸을 사랑하는 한 남자가 나에게 베푸는 애정 또한 소중한 기쁨임을 알게 되었다.
‘많이 사랑하고 예쁘게 살아다오.’
도란도란 귀엣말하며 나란히 나서는 모습을 보며 새롭게 얻은 또 하나의 사랑을 확인한다.
미국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여주인공 프란체스카는 딸에게 “인생은 더없이 아름다웠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이 대사를 조금 더 풀이해서 말해 줄 것이다. “인생이 기쁜 것은 사랑 때문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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