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나는 헤드폰을 귀에 걸고 인접해 있는 계곡으로 간다. 이 시간에 방송되는 라디오에는 ‘말 말 말’이란 코너가 있는데 각계각층의 사건들을 유머러스하게 전해 준다. 실감 나는 것은 성우가 성대모사까지 해 주어서 듣는 이가 재미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유난히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눈에 띈다. 산을 오가며 자주 만나는 분인데, 고령의 어른이시다. 이 어른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상대가 흥미 있어 하는지 없어 하는지 아랑곳없다. 그럴 땐 상황을 봐가며 슬며시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다.
오늘도 잣나무가 있는 숲까지 갔다 내려오는 길인데, 산그늘에서 몇 분이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계셨다. 그분의 긴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 목이 타셨는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는데, 아뿔싸! 그 잔에 벌 한 마리가 들어간 것이다. 넘어가면서 목구멍을 쏜 것이다. 급기야 신음을 내며 쓰러지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얼굴은 붉게 부어올랐다. 다행히 구급차가 도착해서 병원으로 직행했다.
말이 많은 것도 공해다. 각자 바쁜 일상, 여간해서 느긋하게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겠는가.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대화를 구사(驅使)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 같다. 구급차가 사라지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간관계로 해서 늘 쓰이는 말(言), 이 말이란 무엇일까. 새롭게 화두가 되어 머리에서 맴돈다. 그리고 오래전에 말 때문에 절교를 한 친구들이 생각났다. 다들 막내의 입시를 앞둔 겨울이었다.
“네 딸이 지방 대 00 갔다며 ?”
한 친구의 이 한마디가 화근이 되었다. 아이가 몸이 아파서 학교를 쉬었고, 그 바람에 지방대 분교를 가게 되어 속이 타고 있던 터에, 한 친구가 생각 없이 던진 말이 비수처럼 꽂힌 것이다. 성적도 좋은 아이였는데 몸이 아팠으니 친구의 안타까움이야 오죽했겠는가.
살다 보면 마음 아픈 일이 종종 생긴다. 위로는 못할망정 아픈 곳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결과라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말이란 달콤하고 감미로운 언어도 있지만, 동시에 칼날같이 예리하여 마음을 벨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다. 생각 없이 한 말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진심으로 사과해야 함은 물론이고, 시기를 놓쳐버리면 그 실수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젊은 날 아이를 키우며 시집살이할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았다. 시어머님이 남다르게 사랑이 많은 분이셨기에 더욱 어려움을 몰랐던 것 같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사니, 나 하나 참으면 집안이 편한 법이란다.”
어느 날 어머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다. 얼마나 보시기에 민망하셨으면 그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하면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다.
유능한 앵커이며 말하기 전문가 ‘바바라 월터스’가 쓴 <당신도 말을 잘할 수 있다> 라는 책을 보면 몇 가지 요령을 언급했다.
‘나 중심의 생각을 벗어나 상대방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것이 말을 잘하는 첫 번째의 기법이다. 예의 바른 태도, 사려 깊은 행동, 올바른 언어 선택, 웃음을 자아내게 한 이야기는 결코 버리지 않았다.’ 라고 했다. 그리고 때로는 침묵도 필요했다고 강조한다.
정중한 어법으로 매너 좋은 말솜씨,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비단같이 고운 말은 사람의 마음을 토닥여 주고, 부드러운 말은 가슴을 따듯하게 한다. 만나는 모임을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하고, 전화를 걸기에 앞서 상대가 기분 좋아할 말을 궁리하신다는 나의 스승님, 그분의 말속에는 유쾌하고 배우는 것이 있었고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함이 배어있었다. 세상을 부드럽게 살아가려면 적어도 이 정도 센스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문이 닫히지 않은 집과 같다.’ 라는 탈무드의 격언처럼 선현들의 가르침을 새겨 말을 아낄 줄 알고 적절히 하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 같다.
말을 잘한다는 것. 그것은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고 나아가서 함께한 그 시간이 유익하고 즐거웠다면 그 사람은 최고의 화자(話者)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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