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 중순, 간밤에 내린 비로 숲 속 향기가 상큼하다.

아침 여섯 시쯤이면 나는 산행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관악산 줄기 아래 있는 호암산이다. 정상에 있는 바위 모양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천하 대장군, 지하 여장군, 두 개의 장승이 익살스러운 얼굴로 등산객을 반긴다. 초입에 들어서면 숲 속 향기는 한결 산뜻하다. 산세(山勢)를 설명하는 안내도가 서 있고, 말라 있던 계곡에 물소리가 시원하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예, 날씨가 좋습니다."

산을 오른 지 여러 해 되어 낯익은 얼굴이 많다. 약수터 표지판을 보며 가다 보면 '푸른 숲 가꾸기'에서 만들어 놓은 나무 계단과 난간을 만난다. 산그늘에도 긴 의자가 띄엄띄엄 있는데, 나무의 곡선을 그대로 살려서 한껏 운치를 더해준다. 한번 쉬었으면 할 때 만나는 의자는 통나무를 생긴 그대로 잘라 만들었다. 나지막하게 설치해 놓은 모양새가 펑퍼짐한 아줌마들 엉덩이같이 생겨서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깍깍” 까치는 아침 인사를 한다.

“너희도 잘 잤니?”나도 화답을 해준다.

낙엽송이 시원하게 뻗어있다. 나무 표피가 하얀색은 자작나무, 그 나무 앞에는 작은 정자가 있다. 올라온 길을 마주하며 나는 숨을 돌린다. 서울과 안양을 달리는 차들이 보이고 내가 사는 아파트도 시야에 들어온다. 먹이가 괜찮은지 통통하게 살이 찐 청설모 한 쌍이 소나무를 안고 돌며 올라간다.

"뒤따라가는 녀석이 수컷일 거야"

"무슨 소리, 요즘은 암컷이야."

동행한 친구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곳 시흥 호암산은 갓 가지 새가 많다. 안양에 있는 서울 대학교 수목원과 산줄기가 닿아 있어서다. 초봄에는 나무 쪼는 소리가 온 산을 울리더니, 딱따구리란 녀석이 나무 중간쯤에 둥지를 틀었다. 새끼 두 마리가 조그만 입을 벌리며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이 앙증맞고 귀여워 보는 즐거움이 한몫했는데, 서운하게도 이십여 일 만에 떠나버렸다. ‘휘이익 쪼르르 쪽쪽쪽...,’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운다. 나는 이 새 울음소리를 들으면 <북한 답사기> 묘향산 편이 떠오른다. 그곳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휘파람새는 홀아비 귀신이 변한 새란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호올딱 벗고 자자. 호올딱 벗고 자자 호호호' 하고 우는 거란다. 하기야 소리가 고운 꾀꼬리도 처녀 넋이 변한 새 인지라 울 때마다 '머리 곱게 빗고 시집가고지고 가고지고' 그렇게 운다는 설이 있다.

(韻)을 맞추어보면 그럴싸하게 맞는다. 새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 수십 가지로 들린다고 한다.

노간주나무, 개암나무, 박달나무, 그리고 밤나무가 동무해주는 오솔길로 접어들면 칼같이 생긴 칼바위가 위용을 자랑한다. 그 기세를 감상하며 조금 더 오르면 '한 우물'이라는 우물이 나온다. 신라 시대에 만들었다 하는데, 가물 때는 기우제를 지냈고 전시에는 군용으로 사용 했다한다. 기이한 일은 이 높은 곳에 어떻게 맑은 물이 늘 고여 있는지, 심한 가뭄에도 물은 마르는 일이 없다.

정상에는 해태 상하나가 우뚝 서 있다. 조선 왕조 도읍설화에 기록된 것은, 경복궁 해태와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누름으로써 장안의 화재를 막기 위해 세운 거라고 했다. 주술적인 뜻이 있나 보다. 그 밖에도 무학 대사가 창건했다는 호압사가 있고, 전시 때 치열했을 것 같은 성터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성터 너럭바위에 앉는다. 산허리를 감고 있는 구름과 능선이 아름답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하고 골짜기에 얼굴 내민 노란 아기 똥 풀은 오늘따라 더욱 곱다.

이산을 찾은 지 십여 년이 넘는다. 하늘 높은 줄 모른다더니 작은 키에 몸은 비대해지고 숨을 쉬는 것이 버거운 증세가 왔다. 그 무렵, 동네 한 분이 위암 수술을 받았는데 회복이 빨랐다.

"참, 건강해 보이시네요."

"새벽에 호암산으로 등산하러 다녀요, 근력도 생기고 기분도 좋아요."

그 후 나는 그분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계곡을 끼고 생긴 등산로는 가파르지 않아 좋다. 봄이면 싸리 꽃이 흐드러지고 오월이면 아카시아 향이 온 산을 덮는다. 멀미날 것 같은 밤나무 향도 빼놓을 수 없다. 여름이면 우거진 숲에 새들의 울음소리, 가을엔 나뭇잎과 떨어진 밤송이, 도토리 줍기에 바쁜 다람쥐와도 눈을 맞춘다. 그리고 한겨울의 눈부신 설경, 이제 나는 이 호암산에 묻혀 산다.

일이 힘들 때도 마음이 편치 않을 때도 나는 자주 산에 올랐다. 그때마다 이 산은 나를 넉넉하게 품어주었다. 나뭇잎에 매달린 이슬이 이마를 적시면 가던 길을 멈추고 조롱조롱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를 본다. 봄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떨어트리는 가을을 준비하는 나무들, 불평 없이 자기 삶에 충실한 모습을 보면, 나도 자연을 닮아보자 애써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짙은 솔 향에 잡생각을 씻어내고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콘트라베이스 음향처럼 조용하면서도 장엄하게 찾아오는 자연의 숨소리,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있다고 생각해보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루를 여는 아침의 맑은 정기를 가득 안고 하산하는 길은 잣나무가 있는 숲길이다. '사랑할 것이 너무 많다'는 라디오 진행자의 오프닝 멘트가 오늘따라 기분 좋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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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