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와 느티나무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계단 옆에는 우람한 호두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실히 이십여 년이 넘었다고 하니, 사람으로 치면 간난 아기가 청년이 된 셈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이 손바닥만 한 잎 사이로 영글어가는 호두를 주렁주렁 달고 있어 오가며 나는 자주 올려다본다. 작년 가을, 옆집 아우님이 호두 세 개를 맛보라며 내 손에 쥐여주었다. 어찌나 야물 지게 여물었는지 속이 꽉 차 있었다. 그때 이 큰 나무가 호두나무라는 것을 알았다.
지지난해 봄, 한내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나이 탓이겠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이 번거로워 출입이 편한 일 층을 택했다. 우선 봄이 되니 코앞에서 새빨간 앵두가 인사를 했다. 매화꽃 향기가 봄내 나를 취하게 하더니 매실도 달렸다. 뿐만이 아니라 맞은편 갓길에는 제법 큰 살구나무가 있어 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유년 시절 시골집에 있던 살구나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봄꽃이 지고 나니 과실들은 제 색깔을 내며 익어갔다.
"살구 주우시네요."
"설탕 넣고 버무려 두었다가 두어 달 후에 먹으면 참 맛나요. 가져다 한번 해 봐요 "
연세가 팔십쯤 되어 보이는 안노인 말씀이다. 샛노랗게 익은 살구는 아기 볼살처럼 결이 고왔다. 깨끗하게 씻어 소주와 식초를 넣은 물에 댓 시간 담갔다가 건져냈다. 조금은 술도 담았다. 두어 달 지나 며칠 전에 맛을 보니 향이 대단하다. 그래도 과일주 아닌가. 앵두 잼도 만들어 보고, 실한 매실을 따서 매실청도 담았는데 백일이 지나야 한다니 맛이 어떨지 기대가 된다. 이곳 와서 과실 따는 재미, 효소 담는 재미, 많은 양은 아니지만 뜻밖에 호사를 누린다. 입추가 지나고 내가 눈독을 들이는 것은 가지가 휘도록 달린 대추와 감이다. 헌데 감은 건드리지도 말라는 옆집 아우님 말이다. 사연인즉슨 복도 끝 집 안주인이 입주 당시 감나무를 심은 장본인이란다. 어느 사람도 손을 대지 못하게 엄포를 놓은 것 같은데, 문제는 그 감나무가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다는 거다 .
이른 아침,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붉게 익어가는 사과도 보이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모과도 보인다. 아파트 안에 있는 과실이라 어떨까 찜찜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농장인들 소독하지 않고 과실나무를 키우겠는가, 관상용으로 심었겠지만 생각보다 튼실하고 예쁘다.
아무래도 이곳은 사람이 살기 좋은 점을 특별히 고려해 설계한 기획도시 같다. 숲이 우거진 것도 그렇고 동마다 창문이 남향이다. 누가 조성을 했는지 지금의 이 환경이 고맙기만 하다.
이 동네는 양산이 필요 없다. 길을 따라 자란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어쩌다 외출했다가 들어 올 때면, 마치 시골 숲 속 마을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나무가 많으니 새들도 많아 새벽이면 그들의 노랫소리에 잠이 깬다. 내가 알아보는 새는 유감스럽게도 참새보다 크고 까치보다 작은 박새다.
유난히도 더운 올여름,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있으면 솔솔 부는 바람 덕분에 더위가 사라졌다. 나는 이곳에서 FM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다만 가끔은 오래된 관을 교체하느라 소음으로 시끄러운 날도 있지만 크게 성가시진 않다.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열대야, 도시의 열섬현상이 날로 문제란다. 해결책은 도심녹화라고 하는데, 이 동네는 숲이 주는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칠월 말쯤 녹색연합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스팔트와 숲 속 지면 온도 차이는 무려 두 배 이상 난다고 보도했다. 또한, 한 낯의 열기를 줄이고자 옥상 정원을 만드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해마다 열리는 과실들과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상쾌한 공기를 내어주는 키 큰 나무들, 푸른 잎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인다. 문득 요즘 읽고 있는 성경 말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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