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로 접어들어 장마가 길게 이어졌다.

   그 눅눅함이 지루해 대청소를 시작했다. 우선 책 정리부터 하고 나니 월간지가 많았다. 신간 소개도 있고 문단의 훌륭한 선생님들의 옥고(玉稿)가 실려 있는데, 버리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언뜻 일층 경비실 앞에 광고물 놓이는 자리가 생각났다.

“아저씨, 버리기 아까운 책이라 여기 좀 쌓아 놓을게요.”

“그러세요.” 흔쾌히 답을 한다.

    한 이틀 지났을까, 외출했다가 들어오는데 한 권도 눈에 띄지 않는다. 혹여 귀찮아 폐지로 버렸나 싶어 신경이 곤두섰다. 경비원 아저씨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젊은 아기 엄마도 들고 가고 아저씨도 가져가서 없어진 거라고 일러준다.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사는 이 변두리 아파트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렇듯 많다니 기분이 좋았다. 어쩌다 가끔 월간지가 편지함에서 사라지는데, 그것마저도 누군가 나 대신 잘 읽을 거란 생각에 그리 불쾌하지가 않다.

    나 어릴 때, 아버지는 이야기책을 소리 내어 읽으셨다. 가을걷이를 모두 끝내고 난 동짓달과 섣달, 그 긴 밤은 아버지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심청전, 춘향전, 장화홍련전, 위에서 아래로 써 내려간 이야기책을 어떻게 그리도 맛있게 읽으시는지, 청이가 동냥을 하러 다니는 대목에서 너무 불쌍하여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한참을 유창하게 읽으시다가 가끔

 ‘무-엇이-냐’

   하는 말을 추임새처럼 자주 하셨는데, 그때는 그 말이 책 속에 쓰여 있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읽던 곳을 놓치거나 숨을 고를 때 하셨지 싶다. 어머니는 터진 옷을 꿰매거나 양말을 기우며 옆에서 들으셨다. 아버지의 한량 끼로 자주 다투셨는데 그래도 부모님께서 다정하게 보였던 모습은 그때로 기억된다.

    내가 소설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순애보, 상록수, 무정, 친구끼리 돌려본 테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 책 속에 빠져 밤을 새운 기억이 난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삽 십대 중반이 넘어서야 책방 나들이를 했다.

    이따 끔, 나는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마치 아버지가 읽으시던 것처럼, 한참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실리어 리듬을 타게 되고, 내용이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온다. 잡생각에 휩싸여 집중되지 않을 때, 혹은 졸음이 올 때는 아주 효과적이다. 내가 내 목소리를 들으니 음성 조절이 되고 토씨 하나 빼놓지 않으니 어눌해지는 발음에도 도움이 된다. 그리하여 지금은 기회가 주어지면 주저함 없이 책을 읽는다.

    우리 옆집에는 초등학교 일 학년 개구쟁이가 산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어 그런지 책 읽는 소리가 들린다. 모처럼 아이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엄마랑 공부 때문에 실랑이하는 모습만 보다가 신통한 생각이 들었다. “책도 읽고 착해라”

“한 권 읽으면 천 원 주기로 했거든요.”

돈을 줘 가면서도 읽히려는 엄마, 그리고 읽고 있는 아이를 보니 풍경이 재미있다.

    옛날 고전을 보면 책은 눈으로 읽지 않고 소리 내어 읽었다. 목청을 돋우고 책을 읽으면 선생님은 좌우로 몸을 흔들고 학생은 앞뒤로 흔들었다. 소리 내어 거듭 읽다 보면 외우기도 쉬웠을 터, 공부가 더 수월했을 것만 같다.

‘자제들이 글 외우는 소리가 유창하여 병 속에 물 따르는 것만 같으니 이 또한 통쾌하지 아니 한가?’

    청나라 때 김성탄이 쓴 쾌설(快說)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33개의 통쾌한 장면을 떠올리며 쓴 글인데 그 중의 하나이다. 책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묵독(黙讀)을 하는 것보다 소리를 내어 정성껏 읽는 것은 어쩌면 책을 지은이에 대한 예우가 아닐까.

    맛깔나게 책을 읽으시던 아버지, 저승 가셔서도 그렇게 책을 읽고 계실까.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책을 읽으시던 바로 그 모습이다. 동지섣달 긴긴 밤이 아니어도 조용한 밤이면, 나는 그 목소리가 못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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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