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여름이다.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아일랜드의 전통춤인 ‘아이리시 댄스’를 보게 되었다. 동(動)적인 것을 좋아해 그런지, 그 춤은 나를 단박에 사로잡았다. 체격이 건장한 남자 댄서 삼십여 명이 삼 층 계단식으로 꾸며진 무대에서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춘다. 상체는 움직이지 않고 발만 움직인다. 빠른 템포에 마룻바닥을 구르는 탭댄스, 그 모습은 경쾌하다 못해 박진감마저 느껴졌다.

아일랜드는 유럽의 북서쪽에 있는 큰 섬이다. 호기심에 그 나라 지형을 찾아보니 이 섬은 그 옛날 얼음에 덮여 있었다고 한다. 추운 지방일수록 발을 구르는 춤이 발달하였다고 하더니 이곳도 그런 모양이다. 어찌나 경쾌하던지 나이를 잊고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해가 바뀐 지 며칠 된 연초, 세종문화회관 대 극장에서 ‘아이리시’ 댄스공연을 한다는 문구가 방송 자막으로 나왔다. 문의를 해보니 아일랜드 전통댄스와 민속 음악을 바탕으로 한 '춤의 영혼'이란 집단이란다. 모처럼 볼 기회가 왔는데, 입장료가 만만치가 않다. 친구를 불러낼까, 아니면 언니와 동생을 불러 함께 할까, 궁리를 하던 차에 시집간 딸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생일 때 무엇을 해 드리면 좋으냐는 물음이었다. 조금 부담은 되겠지만 내 의중을 말하기로 했다. 

"아일랜드 댄스가 보고 싶어, 그런데 입장료가 만만찮네."  

"엄마가 보고 싶다 하시면 해 드려야지요." 하며 호호 웃는다.

인터넷으로 딸은 예매를 했고, 직장에 나간 가족들은 조금 일찍 퇴근을 했다. 우리는 공연시간을 여유 있게 두고 집을 나왔다. 운전은 사위가 하고 딸들은 뒷자리에서 댄스 이야기를 한다. 모처럼 색다른 나들이에 조금씩 들뜬 것 같았다. 하긴 나도 십여 년 만의 걸음이다. 강당 입구에는 주먹을 불끈 쥔 춤동작 사진이 시선을 끌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 좌석을 찾았을 때는 객석은 빈자리가 없었다. 순간, 우리 민족도 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 배경은 아일랜드 켈트족 전통 문양이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켜지자 마치 딴 세상에 온 듯 현란하다. 이윽고 감미로운 댄스곡이 연주되고, 보석이 반짝이는 흰 드레스의 여인과 검은 정장의 남자가 짝을 지어 미끄러지듯 왈츠를 춘다. 그리고 뒤이어 삼십여 명의 남자 댄서들이 등장을 했는데 빨간 티에 당당한 체격이다. 방송에서 보았던 그 발놀림을 여기서 본다.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정확하게 움직이는 탭댄스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관중은 리듬에 맞추어 손뼉을 치고 나도 자꾸만 발을 구르게 된다. 

탭댄스는 흑인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추었던 춤으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자기들의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 지금의 탭댄스라고 한다. 품격이 느껴지는 아르헨티나 탱고, 관능을 과시하는 라티노 살사, 고전발레, 레이스가 나풀대는 빨간 드레스에 발 구르기와 손뼉을 함께 치며 돌아가는 훌라맹고 춤은, 즉흥적인 열정을 토해낸다. 고난도의 테크닉과 완벽한 조화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탭댄스와 다양한 모던 댄스와의 환상적인 만남> 이라고 춤을 소개한 문구가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모처럼 댄스파티에 빠져 즐거워하는 딸들을 보니 나는 문득 옛일이 떠올랐다.

80년대 초,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村) 댁은 어린이날 하루는 하던 일을 접고 이 강당을 찾았었다. 연극은 아이들의 정서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고 무엇보다도 기죽이지 않고 키워야겠다는 야무진 속내가 있었다.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온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엄마, 옛날 생각나네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큰애가 말한다. '파랑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추송웅 씨,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기저귀를 찬 아기로 분장하고 연기하다 무대에서 떨어져 관중을 웃겼던 일, 오즈의 마법사에서 마녀로 분장한 윤복희 씨의 가창력과 리얼한 연기, <피터 팬> < 백설공주> < 헨젤과 그레텔> 다들 용케도 기억했다.

"어머님 덕분에 춤의 진수를 감상했습니다."

"나도 댄스파티에 초대해주어 고맙네."

음악을 좋아하는 사위가 흡족한 표정이다. 극장을 나오니 막내가 기념 촬영을 한번 하자고 한다. 커다란 포스터 앞에 사위는 주먹을 치켜들고 딸은 왈츠 춤을 추듯 스커트 자락을 잡는다. 우리는 폭소를 터트리며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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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