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술사랑 이야기는 미술로 풀어낸 술의 얼굴이다.’
<세상을 취하게 하라, 愛 술로> 라는 주제를 걸고 예술 속에 술을 다룬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과연 술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호기심이 발동을 했다. 술 하고는 평생 인연이 없는 얌전한 친구 한 명을 불러냈다.
안국동 미술관 입구에는 술이 담긴 작은 잔이 놓여 있고, 전시장에선 은은한 술 냄새가 풍긴다. 나는 천천히 그림을 둘러보다가 한 작품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제목이‘한잔하고 바라본 세상’이다. 눈동자 두 개가 동력 장치를 달아 뱅글뱅글 돌고, 취해서 바라보는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한잔의 유혹, 욕망의 해방구, 중독의 상처, 취중 파노라마, 십여 명의 작가들이 그림으로 풀어낸 술의 얼굴은 흥미롭고 독특했다. 특히‘취무(醉舞)’는 한쪽 발을 들고 엉거주춤 춤을 추고 있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예술가들의 고뇌라고 할까, 삶의 애환이라고 할까, 묘한 감정을 안고 전시장을 나왔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술, 과연 그 술은 무엇일까? 새삼 궁금증이 일었다.
조선 후기 화가 오원(吾園) 장승업은 술이 있어야만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대표작<호취도>를 보면 독수리의 장쾌한 기상이 느껴진다. 억센 발톱과 매섭게 쏘아보는 눈은 금세 날아오를 듯 생기가 넘친다. 언젠가 오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취화선’을 감동으로 본 적이 있다.
천민으로 태어나 그의 삶은 술과 예술이었다. 무엇보다도 영감을 북돋아 주는 것은 오로지 술이었다. 호방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로 생동감 넘치는 작품을 남겼으나, 속박을 싫어해 구름 같은 인생을 살았으며 난국(亂局)으로 가는 암울한 시기에 자기만의 색깔을 찾고자 수없이 고뇌했다.
끝 간 곳 없는 수평선에 백구(白鷗)는 날고 작은 봇짐 하나 둘러메고 정처 없이 떠나는 오원, ‘생사란 뜬구름과 같은 것, 앓는다, 죽는다, 장사를 지낸다, 떠들 필요가 무어냐?’ 그가 남긴 말에서 인생무상과 그의 인생관이 엿보인다. 고민하고 방황하고 광기의 삶을 살았으나 그림에 취한 시선(詩仙)으로만 기억되는 것은 살다간 발자취가 신비롭기 때문일까.
삼사 년 전만 해도 나는 술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더구나 취해서 눈동자가 허공에 걸린 사람을 보면 그 자리를 피하기에 바빴다. 술이 술을 먹고 그 술이 깨도록 주사가 고약한 사람을 보면 허물없이 지내다가도 두 번 다시 어울리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별로 말이 없던 사람이 술 한 잔을 하면 갑자기 다변(多辯)이 된다. 주벽이 심해 싸움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징징 울기도 한다. 취한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뭐 그럴 것까지 있을까 했지만, 술버릇이 고약한 사람을 보면 ‘쯧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차게 된다.
가끔 저녁 모임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술잔이 내게로 온다.
“자네도 이제 한잔해도 될 나이가 되었네.”
술 마실 때가 되었다면 나도 나이가 많다는 뜻 일게다. 어찌 되었거나 한 잔씩 받아 마신 것이 계기가 되어 이제는 조금씩 하게 되었다. 헌데 나는 술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웬일인지 기분이 좋아진다. 뿐인가 노래도 나온다. 껄끄러운 사람도 편안하게 보일 만큼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전화를 받다가 느닷없이 흥얼거려 실례를 범한 적도 있지만, 조금은 취해 우스갯소리도 하고 너스레도 떨고 그렇게 농을 좀 하는 사람이 좋아진다. 어쩌다 한잔 술에 흥얼거리면,
“남 여사 망가지는 것도 하루아침이네”
나를 ‘새침데기’라고 불렀던 이웃형님의 말이다.
내 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셨다. 그 유전인자를 고스란히 받았는지 내가 남아로 태어났다면 술깨나 마시는 한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하고 아이들 키우고 반평생을 내 딴에는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한잔한다고 누가 나를 탓하겠는가. 술상 앞에서 조금은 흩어져도 괜찮을 터, 구차한 변명으로 자신을 격려할 때도 있다. 세월이란 참 무서운 것이라 느껴진다. 내 삶에서 정도(正道)만 추구했던 내가 이제는 칼같이 정확한 사람을 보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예술가의 영감을 북돋아 창작을 도와주는 술, 서먹한 자리도 한잔 돌아가면 부드러워지고 인간관계에 윤활유가 되어주는 술, 좋은 사람들과 한잔 기울이며 삶의 노곤함을 풀어 버린다면 그 자리가 왜 아니 즐겁겠는가. 비로소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집에서 담는 약술도 과하면 몸을 해한다 했으니 본인의 주량을 알아 알맞게 마시고 기분 좋게 깬다면, 술은 마음의 갈증을 풀어 주는 좋은 벗이라 생각된다.
살기가 어려운 요즘, 지나치어 실수하지 않는다면 조금은 취해서 살아도 좋으리라. 사람에 취하고, 아름다운 산수(山水)에 취하고, 그리고 사랑 (愛)의 술로 가끔은 취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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