솨 - 아 바람이 분다.

드넓은 평야에 키가 큰 호밀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열한 살 자리 꼬마는 눈을 감고 그 움직임의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다. 그리고 이내 양팔을 벌려 지휘를 한다. 지그시 눈을 감은 소년의 얼굴은 마치 달콤한 꿈속을 거니는 듯 행복해 보인다. 시네라마로 다가오는 밀밭과 소년, 자연을 배경으로 한 영상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아빠와 첼리스트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특별한 음의 감각을 가진 소년 어거스트, 부모의 신분 차이로 외조부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 아이는, 입양을 거부하고 엄마 아빠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기차를 탄다. 레일 위를 달리는 바퀴 소리도 음악으로 듣고 주변에서 들리는 잡음까지도 곡(曲)으로 듣는다. 음악의 천재성을 가진 아이는 우여곡절 끝에 ‘뉴욕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고, 마침내 공연장에서 애타게 그리던 가족을 만난다. 밀밭에서 바람 소리를 지휘하던 소년은 청중을 향해 지휘봉을 힘차게 휘젓는다. 며칠 전에 본 ‘어거스트 러쉬’라는 영화 내용이다. 줄거리는 단편 소설을 보는 듯했지만, 내 가슴에 감동으로 남아있는 것은, 11세 소년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는 것이었다.

잎들이 반짝이는 봄, 요즘에 내가 듣는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이다. 워낙 유명한 곡이지만, 다시 한 번 음미하며 들어보니 느낌이 새롭다.

‘신 나는 봄이 와

새들은 흥겨이 노래하며 반기고

냇물은 산들 바람 실어

도란도란 흘러간다.’

유럽 서정시 소네트가 곡을 소개하는 글에 쓰여 있다. 봄 1악장 빠르기를 지시하는 알레그로, 곡은 마치 맑은 호수에서 영롱한 물방울이 마구 튀어 오르는 듯 생동감이 느껴진다. 찬란한 봄의 기쁨이 표출되어있고 생명이 숨 쉬는 움직임이 들리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깨어나는 봄, 아름다운 음률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간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클래식이 우연히 만난 한 편의 영화 덕분에 무지했던 귀가 열린다.

내 스승님은 클래식을 즐겨 들으셨다. 브람스, 베토벤, 바흐, 쇼팽, 모차르트, 음반을 바꾸어 걸어 드리면서도 건성으로 들었다.

“음악을 듣다 보면 그들의 영혼과 만나는 것 같아”

곡을 들으시며 이야기하셨을 때도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무식꾼 그 자체였다.

초여름으로 가는 유월, ‘로테르담 필하모닉오케스트라’ 공연이 있다는 소식에 나는 작정을 하고 집을 나섰다.

세종 문화회관 대 강당, 객석을 메운 청중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젊은 지휘자 ‘야닉’이 무대로 나와 인사를 한다.

연주하는 곡은 구소련의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다. 악기를 안고 70여 명의 단원이 준비를 하고 있다. 드디어 1악장 서곡이 흐른다. 화려한 선율의 바이올린, 차분한 음색의 비올라, 중후한 여운을 남기는 콘트라베이스, 저마다 악기가 내는 음색에 나는 놀라고 있었다. 경쾌한 왈츠는 우아하게 춤을 추는 남녀 한 쌍이 그려졌다. 때로는 커다란 산이 다가오는 듯 장대하고, 때로는 높은 파도가 질풍노도 하며 달려오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강렬하고 부드럽고 그런가 하면 플루트의 맑고 깨끗한 소리는 깨어나는 아침 숲으로 나를 안내한다. 이어 새들의 노랫소리에 내 마음은 더없이 평화로워졌다.

지휘봉을 든 야닉은 음을 따라 크고 작게 온몸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신비스런 현악기에 도취하여 시종일관 나는 눈을 감고 감상을 했다. ‘로테르담필하모니’의 탄탄한 연주는 너무도 완벽한 앙상블이었다.

오늘 연주되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은, 투쟁에서 승리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데, 1937년 발표한 곡으로 ‘스탈린의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 이었다’라고 해설이 되어있다. 4반세기를 독재적으로 통치하던 시기,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소련을 핵시대로 이끈 그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이 작품 속에 녹아 있었다. 정치적 공포감, 애수에 찬 번뇌와 침통함이, 그런가 하면 다시 희망과 기쁨, 그 모든 것이 4악장에 걸쳐 표현되었다. 마치 인생의 모든 역정(歷程)이 곡속에 다 들어있는 것 같았다. 두 시간 공연에서 나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과 여린 감성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클래식, 그 마법과도 같은 곡을 만든 음악가들은 일찍이 자연의 숨소리를,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었다. 앙코르곡까지 듣고 자리를 떠나며 그들의 영혼과 만나는 것 같다고 하셨던 내 스승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였는지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요. 마음만 활짝 열기만 하면 돼요.”

음악을 사랑한 소년 어거스트, 그 꼬마가 한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