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라’ 봄의 여신이란 이름으로 대학가에 카페 문을 연지 삼 개월이 되어간다. 아침청소를 하고 나면 커피를 내리는데 그 은은한 향은 언제나 기분을 좋게 만든다. 금세 만들어 오는 케이크도 있고 생과일주스도 있다. 힘든 입시 공부를 마치고 대학생이 된 풋풋한 얼굴들, 그들은 짝을 찾기에 분주하다. 이십여 명이 함께 만나는 그룹 미팅이 있고, 삼삼오오 몰려와 만나는 소개팅이 있는가 하면, 이르게 짝을 찾은 연인들은 다정하게 손잡고 들어와 이야기꽃을 피우며 마냥 즐겁다.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상기된 얼굴이 막 피어난 꽃송이다. 인간도 때가 되면 짝을 찾고 둥지를 틀고, 그 보금자리에서 저마다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짝 찾는 일은 인간대사(大事)라. 나는 재미있어서 자꾸만 눈길이 그쪽으로만 간다.
어느 해던가 늦은 여름, 경상도 문경쯤이었을 것이다. 뭉게구름이 걸린 산모롱이에 야트막하게 자리한 카페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통나무로 난간을 두른 발코니에는 넉넉한 의자가 놓여있고,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가니 단순하게 꾸며진 실내는 고즈넉한 시골 오후를 낭만으로 채워주고 있었다. '해변의 정사'라는 희한한 이름의 칵테일을 마시며 모처럼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동안 이곳저곳 우리 강산을 돌아보며 마음을 빼앗긴 카페가 어디 그곳뿐이겠는가. 아늑한 분위기에 편안한 실내, 향기 좋은 차 마시며 누구나 편히 쉬었다가는 공간은 내 마음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와도 좋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찾아와 즐거운 이야기로 담소하며 마냥 앉아 있어도 좋다. 일상이 고단할 때 요한슈트라우스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 이나 아니면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 들으며 차 한 잔에 고단함을 씻는 그런 자리, 그들을 맞이하는 내 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그려 왔었다.
윤재천 선생님의 수필집 '구름 카페'에는 역마살 낀 나그네가 있고 고갱의 그림도 있지만, 나는 좋은 시구 몇 점 걸어두고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 그림도 좋고 아침이슬 반짝이는 숲 속 그림도 좋았다.
15 년 하던 일을 정리하고 무료하게 보낸 지 삼년, 울적해하는 내 마음을 딸들은 알고 있었는지 무슨 일이든 다시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 나는 카페가 떠올랐다.
큰 아이가 실내 장식을 맡고, 디자인을 전공한 막내가 간판을 고안했다. 실무(實務)는 둘째와 내가 하기로 하고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내장식이 젊은 세대들의 취향으로 가고 있었다. 심플하고 모던한 분위기가 깨끗하고 단순했다. 내가 그려 왔던 카페는 사라지고 손님들과 어울려 보겠다던 꿈도 사라졌다.
"대학가에 있는 카페에 젊지도 않은 네가 있으면 오는 애들이 편하겠니? 참 꿈도 야무지다."
핀잔을 준 친구 말대로 안타깝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방일 돕는 것과 청소뿐이었다. 그래도 카운터에 자리 하나 마련했는데 아이들은 주문이 많다. 노란 머리나 빨간 머리, 기이하게 염색한 머리를 봐도 절대로 쳐다보지 말고, 담배를 피워도 혹은 뽀뽀를 해도 웃지 말란다. 한동안 신경이 쓰여서 거동하기가 편치 않았다. 그러나 한두 달 지나면서 '엄마 같은 내가 좀 있기로서니 어떨라고.' 하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럭저럭 퓨전 재즈도 귀에 익어가고, 무엇보다도 우리 카페를 찾는 이들이 편히 쉬었다 간다.
"케이크 참 맛있어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꽃으로 치면 막 피어나는 봉오리, 계절로 치면 생기 넘치는 봄이라 순수하고 젊은 그들 덕분에 나도 조금 젊어지는 것 같다. 이제는 아늑하고 편한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여유도 부린다. 그동안 과로했는지 몸살이 와서 나는 며칠 쉬고 있다.
싸리 꽃이 핀 동네 산을 오르는데 다람쥐 두 마리가 전나무를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달음질친다.
"너희도 사랑놀이하니?"
나는 한마디 던져주고 웃는다. 그리고 카페 '플로라'에 쌍쌍이 앉아 있을 젊은이들을 떠올리며 또 한 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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