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가 달포나 끈질기게 나를 잡았다.

   콩 만 한 편도선이 부어 침을 삼키기도 어렵고 기후 탓이라는데, 신종 바이러스가 체질 따라 침투해 나갈 줄을 몰랐다. 코 막힘과 띵한 머리 하루거리처럼 해질녘은 더했다. 심해지는 공해 때문이겠지만 ‘오뉴월 감기는 뭐도......’ 하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하지는 않았는데, 큰 병이라도 생긴 것 같아 우울했다. 약을 먹고 어 한기가 들어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쿠션을 기댄 채 누웠다.

   2002년 월드컵, 드디어 막이 올랐다.

   6월4일, 폴란드와의 첫 경기를 보기 위해 큰아이, 둘째, 그리고 사위까지 우리 가족은 이른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았다.

   백일 남았다, 한 달 남았다, 매스컴에서 이야기 할 때마다 세계의 눈이 집중되는 나라 잔치이니 잘 치러 내야할 텐데 하는 염려의 마음이 앞섰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축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열 한 명이 뛰는 것과 볼을 발로 차서 골대 안에 넣으면 한 점을 득점한다는 것 그 정도다. 중계방송에서 ‘골-인’ 하면 그냥 ‘공이 들어갔구나.’ 했다.  노년을 심심하지 않게 보내려면 각종 경기에 취미를 가져야한다는데, 운동 신경이 둔한 편이라 그런지 좀처럼 마음이 가질 않는다.  하긴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가 군대 이야기와 축구 이야기라고 했다지 않은가.  약 기운 때문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와-” 하는 함성이 귓전을 때렸다. 

   “골인, 골인, 어머니 골인입니다” 사위도 딸도 박수를 치며 소리소리 지른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도 난리다. 아파트 전체가 들썩들썩 할 것 같은 함성이다. 첫 꼴을 넣고 달려 나오는 황선홍,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이 거듭 클로즈업된다. 전반전 26분의 선제 골, 나도 가슴이 요동을 친다. 그리고 후반전 유상철의 두 번째 골, 아- 놀라운 첫 승리였다.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의 5만여 관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48년만의 쾌거라고 해설자도 신명이 났다.  광화문, 세종로 네거리, 대학로, 수천 명씩 모인 붉은 악마-  나라 안은 그야말로 감격(感激)의 물결이다.

 

   공격수가 있고 상황에 따라 뛰는 미드필더, 수비와 골키퍼, 그리고 반칙으로 발생되는 옐로카드와 퇴장을 당하는 레드카드, 코너킥과 프리킥, 상대팀에게 쉽게 득점을 내줄 수 있는 페널티 킥, 경기를 보며 배우니 한결 재미가 더 하다. 

   볼이 바나나처럼 휘어서 들어가는 것은 바나나킥, 몸을 공중으로 날려 머리위로 차는 것은 오버헤드킥, 이 슈팅은 멋지고도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태극전사들의 승승장구(乘勝長驅)와 함께 감동은 이어졌다.

   6월 15일, 참가국들의 경기 속에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선수가 있었다. 전차군단으로 불리는 독일 팀의 골키퍼 ‘올리버 칸’이다. 나는 이 선수를 보는 순간 언 뜻 고릴라가 떠올랐다.  눈과 눈썹 사이가 좁고 잇몸은 조금 튀어 나왔으며 가느다란 눈에서는 광채가 났다.  어느 쪽에서 날아오든 간에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는다.  신문에서는 그를 거미손이라고 했다.

   21일 준준결승 날 미국과의 경기에서 칸은 왼쪽 깊숙이 들어간 결정적인 슛을 모서리까지 나와 잡아냈다.  미국의 공세를 철벽(鐵壁)의 수비로 방어한 것이다. 공격수가 힘차게 슛을 하면 거미 손은 어김없이 잡고 만다.  스피드와 순발력, 결코 놓치지 않는 동물 적인 감각에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인간이 저토록 빠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거미 손 이운재- 22일 4강을 눈앞에 두고 연장전까지 몰고 간 스페인과의 120분, 이기고 지는 것이 결정되는 승부차기의 아슬아슬한 순간, 모든 것은 골키퍼 이운재의 손에 달려 있었다. 숨을 죽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양손을 감싸 쥐었다. 드디어 네 번째 키커- 호아킨이 슈팅한 공을 그는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동작으로 막아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아이를 얼싸안고 겅중겅중 뛰었다.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다. 이 통쾌함 속에 슬금슬금 찾아왔던 한기(寒氣)도 꼬리를 감추고 태극전사 이운재 얼굴만이 흐려진 시야 속에 들어왔다.  그는 4강 신화에 주역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 공놀이는 직사각을 그려놓고 했다. 양쪽 라인밖에는 공격수가 있고 안에는 상대팀이다. 한 사람 한사람 공으로 공격을 하는데 맞으면 탈락이다.  공을 받다가 놓쳐도 퇴장이다. 그 대신 날아오는 공을 잘 받으면 실격되었던 친구가 다시 살아 합류한다.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매번 공을 놓치고 만다. 마음으로는 다른 아이처럼 잽싸게 받아 우리 편 하나라도 살리고 싶었지만 피하는 것도 못해 눈총을 받았으니 게임에서 인기가 없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어쩌다 공을 두 손으로 받아 가슴에 안으면 그 성취감은 대단했다. 날아오는 공을 받는 것, 그것의 묘미를 나는 그때 터득했다.

   예측할 수 없는 공을 척척 받아내는 거미 손, 넘어지면서 막아내고 몸을 날리면서 낚아채는 모습은 너무도 놀랍다. 그들은 역시 아름다운 프로였다.

  모든 경기를 끝내고 칸의 웃는 얼굴은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칸과 이운재, 이들의 거미손은 4강이란 영광의 고지 위에 조국을 나란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피파가 골키퍼에게 주는 최고의 상 ‘야신상’ 후보에도 함께 올랐다.

  한 달 여의 감동 속에 독감은 사라지고 나는 이제 축구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졌다. 이 시대를 살아서 극도에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오늘을 위해 우리 가족은 축배를 들었다.               

                                                      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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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 코가 닮았네요. 따님 코가 조금 더 높네요."

여대생인 듯, 처녀들은 딸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며 웃는다. 동그란 얼굴 외에는 꼭 집어 닮은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코가 닮았단다. 일행의 사진을 서로 찍어주고 능선을 향해 오른다.

   이곳은 전라남도 보성, 해발 350M고지의 오선봉 녹차 밭이다. 산마다 큰골이 지어 있고, 능선을 따라 가지런히 자란 녹차 밭은 꿈속인 듯 새벽안개에 쌓여있다. 근간에 채취했는지, 웃자란 여린 잎이 나를 보고 웃는다.

  "엄마, 이쪽에 서 보세요. 안개와 능선, 구도가 멋있게 잡혀요."

  나는 어색하지만 포즈를 취해 보았다. 옆으로 비켜서 한방, 어린애처럼 골 사이에 앉아서 한방, 이 청초한 새벽 풍경을 하나라도 더 담고 싶어 찍고 또 찍는다.


  팔월 초 신문에 '자- 떠나자' 란 타이틀로 전면을 채운 녹차 밭, 그 문구는 나를 유혹했다. 보고 싶었다. 지면을 통해서, TV광고를 볼 때마다 신선한 정경이 삼삼했다. 큰딸이 저녁을 먹으며 마침 며칠 시간이 있다고 했다. 지도를 펴놓고 길을 찾아 표시를 하고 운전은 번갈아 하며 가자고 결론을 냈다.

  간단한 준비와 함께 동이 틀 무렵, 우리 모녀는 1000리 길 장정에 올랐다. 내심 흔쾌히 뜻을 받아준 딸이 고맙고, 오붓한 둘만의 여행이 기뻤다.

  수원을 지나 경부 고속도로 - 회덕분기점,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장마는 소강상태이고, 파란 하늘은 면사포구름을 잔뜩 이고 있다. 장거리 운전에 피곤해하는 딸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주고 나는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호남으로 질주- 광주 도착한 것이 오후 4시, 전라도라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고속도로를 나와 화순에 이르니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오 메, 인자 왔오.' 초행인 나를 보고 던지는 말 같아 웃음이 나왔다. 능주를 지나 보성으로 가는 길은 빨갛게 핀 백일홍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안개가 걷힌다. 성하(盛夏)의 강렬한 햇빛에 녹차 밭이 모습을 드러낸다. 몇 만평이나 될까, 능선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남해의 해풍을 받고 있는 구릉지대, 다습한 기후에 잘자란 녹차 잎은 윤기가 흐른다. 칙벽 나무처럼 생긴 삼나무가 녹차 밭 사이로 우람하게 서있고, 모 광고를 찍었다는 푯말이 모퉁이 에 서 있다.

  " 멋진 풍경이네요. 오길 잘했어요. 엄마."

  " 그래, 딴 세계 같구나"

  단아하게 지어 놓은 정자에 다리를 펴고 누워본다. 산을 뒤덮는 은은한 향기, 어디론가 둥둥 떠가는 것만 같다. 그림을 전공한 딸은 시야에 잡히는 풍경을 스케치한다. 옆얼굴을 바라보니 오뚝한 코가 조각처럼 예쁘다. 언젠가 짝이 생기면 둘째처럼 내 곁을 떠나가겠지, 서둘러 가야함도 분명 한데 오늘의 내 마음은 마냥 행복하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옥과 보다 좋은 신선한 차 보내왔네.

맑은 향기는 한식 전에 따 그런 가

고운 빛깔은 숲 속 이슬을 품었네.

돌솥에 물 끓는 소리 솔바람 소리인양.

자기 잔에 도는 무늬 꽃망울을 토한다.'


고려 후기의 문신 이제현의 시다.


  시음장 벽에 걸린 시구를 읽어보고 우리는 나무로 만든 테이블에 앉았다.

  "삼분을 기다리시고, 세 번을 우려서 드세요. 녹차를 넣어서 구운 쿠키가 있습니다."

  나이는 삼십 후반쯤 되었을까, 다원에서 나온 아낙인데 고운 인상이다. 딸이 따라주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조금씩 음미하며 마신다. 코끝에 스미는 향이 감미롭기 그지없다.

  녹차는 7년이 되어야 채취를 하며, 시기는 곡우 전후에 딴 것을 세작(細雀)이라 하여 최상품으로 친단다. 입하 전후에 딴 것은 중작(中雀)이라 하고 발효 정도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눈다. 잎을 덖어서 엽록소를 그대로 보존시킨 녹차, 10 퍼센트 발효하면 청자, 50퍼센트를 발효하면 오룡차, 100퍼센트 발효한 것은 빛깔이 붉어서 홍차란다. 녹차에 맛은 쓰고, 떫고, 시고, 짜고, 단, 다섯 가지의 맛인데 이중에 가장 먼저 닿는 맛은 쓴맛이고 오래 입안에 남는 맛은 단맛이다. 위로는 머리를 맑게 하고 아래로는 소화를 돕는다고 자세히 설명한다.

    다도는 도(道)와 통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며 예(禮)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오늘은 쉽게 이해가 된다. 차하면 우선 커피가 떠오르고 나도 커피를 즐긴다. 그러나 이제 생각이 바뀐다.  공기 맑은 산하에서 이슬을 먹고 자란 여린 잎들, 거듭 덖어서 손이 가길 수차례, 정성만큼 향도 깊어 세 번을 우려먹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물을 붓고 여유 자작하게 기다리는 침착성, 차석에서 나누는 정담이야말로 현대인들의 심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지 않을까, 오늘에 이 정경(情景)을 가득 담아 작은 차상 하나를 마련하리라.

-이 땅에 나고 자란 은혜를 생각 한다-  이호신님의 기행문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라는 기행문의 머리글이 생각난다. 나 역시, 아름다운 국토에 태여 남을 감사한다.

  "엄마, 우리강산 참 아름답다. 자주 다녀야겠어요."

나는 미소로 답하며 딸 손을 잡고 삼나무 숲을 나왔다. 찌는 듯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마음은 초록으로 물들어 우리는 귀경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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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평 남짓한 녹음실은 밝고 깨끗했다.

책상위에는 녹음기가 놓여있고 의자에 앉으니 편안하다. 헤드폰을 귀에 걸고 마이크를 조절했다. 나는 오늘 책읽기 음성 테스트를 받으러 왔다.  이곳은 경기도 부천에 있는 점자 도서관이다. 건물 안에는 다섯 개의 녹음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지난 초여름부터 벼르다가 아침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얼굴이 동그랗고 안경을 낀 집사님은 기기 사용법과 녹음 할 때의 유의 사항을 꼼꼼하게 설명해주었다.

  유리벽 너머에서 ‘큐’ 사인이 떨어지자 은은한 시그널 음악이 흐른다. 나는 되도록 부드럽게 천천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사단법인 사랑 선교회는 장애인 단체로서 장애인 복지 사업을 목적으로 1985년 설립되었고 각종 장애인 재활교육과 복지 사업을 통하여 장애인들이 정상적으로 사회화 할 수 있도록 돕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이곳 소개를 한다. 그리고 도서명과 지은이를 소개하고 끝으로 읽는 사람을 밝힌 다음 책읽기를 시작한다.  종교서적부터 시, 수필, 소설, 책은 낭독하는 사람이 선택을 한다. 나는 류시화님의 수필집 ‘ 하는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한편을 골랐다. 막상 헤드폰을 타고 들리는 목소리는 다른 삶의 음성처럼 낯설었다. 집에서 소리 내어 여러 번 읽어 보았는데도 숨쉬기 조절이 어렵고  된 발음에서 더듬거렸다. 무엇보다 ‘노 프라블럼’ 이란 외국어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녹음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책장을 넘길 때는 잡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목이 잠겨오면 잠시 쉰다. 간신히 한편을 읽고 나니 긴장해서 그런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어 발음이 엉망이고 리을

발음이 분명치 않았다.

  녹음결과는 목소리는 괜찮은데 속도가 느리고 너무 낮은 음성이라고 했다. 책을 읽을 때의 목소리는 도레미의 레와 미 중간 음이 좋고, 처진 음성은 듣는 이의 마음까지 처지게 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입을 크게 벌려 발음을 정확하게 해주어야 하고 자기 목소리 높이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삼켜졌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연습을 하다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낭독한 책을 듣고 감동이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 보람을 느끼고 말이야,” 이곳에 살면서 여러 해 봉사를 하고 있는 친구

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다른 사람을 위해 조그만 일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 나이 오십을 넘으면 먼 산을 보는 나이’ 라고 한 임어당의 글이 떠오르며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특별하게 잘하는 일도 내세울 것도 없는데, 내 삶 속에는 고맙고 감사한 일이 많았다. 뭔가 작은 일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따듯해 왔다.  그러나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한동안 고심을 했다. 그때 장애인을 위해 녹음 봉사를 한다는 이 친구가 생각났다. 

  맹인을 위한 녹음, 그것도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된다했으니 그간 감동으로 읽은 책을 모두 읽어 주리라 했는데, 소리 내어 읽는 일이 뜻밖에 어려웠다. 

  

   삼십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아이들 선생님과의 면담이 있던 날인데, 내목소리가 방송인이 되었어도 좋았을 거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어쩌다 음성이 듣기 좋다는 말도 한번씩 듣기는 했다. 그렇다고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직업에 오래 종사하다보니 아무래도 음성이 트였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일로 조금은 자신감을 갖고 도전한 것인데, 서너 시간 여 연습을 했더니 목이 잠긴다. 삼사 개월은 연습기간이 소요되리라, 차 한 잔을 마시고 일어 설 때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녁 9시, TV 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유연한 음성이 들린다.  정확한 발음과 음정, 전문직이라고는 하지만 어쩜 저리도 잘 할까. 나는 비로소 감탄을 했다.

  “속도가 느려도 엄마는 해 낼 수 있을 거예요.” 

  막내의 응원이 고맙다.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차분히 연습하면 할 수 있겠지, 나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성껏 읽는다.  후일 누군가 들어줄 그 사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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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허리와 기슭을 뒤덮고, 붉게 물들인 진달래의 만발한 무리를 보지 않고 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우송(友松) 김태길선생님은 ‘아름다운 세상’이란 글에 만발한 진달래꽃을 보며 새봄을 맞이하라 하셨다. 그러나 나는 농촌에서 자라 그런지, 진달래꽃보다는 냉이와 씀바귀를 캐보지 않고, 봄을 보낸다면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서운하다.

   삼월 하순, 앞당겨 온 봄으로 여린 나뭇가지에도 새 눈이 나왔다. 아파트 주변에 산수유, 개나리, 목련, 봄꽃들이 다투어 꽃술을 열고, 봄빛도 찬란하다.  삼동(三冬)을 이겨낸 어린생명들, 하루하루 모습이 다르다.

 

   우리 집에서 안양은 5분 거리다. 한참 예쁘게 나왔을 냉이와 씀바귀가 궁금해, 며칠을 벼르다가 나는 차에 올랐다. 안양으로 가다가 ‘박달동’으로 접어들어 삼십 분쯤 달리다 보면, ‘물왕리’라는 마을이다. 그리 크지 않은 저수지를 안고, 뒤편에는 밤나무가 있는 중간 산이고, 왼쪽으로는 골을 따라 논과 밭이 펼쳐져있는 전답(田畓)이다. 이곳은 내가 봄만 되면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찾아오는 곳이다. 건너편에 낯선 건물 하나 지어져 있고는 지난봄 그대로다. 나는 논두렁길로 접어든다. 가을걷이를 하고 쌓아둔 참깨 단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고추를 따고 뽑지 않은 고춧대 사이에 냉이와 씀바귀가 실하다. 마침 간밤에 내린 봄비로 밭이랑은 마냥 부드럽다. 흙을 듬뿍 떠서, 씀바귀 한 뿌리, 냉이 한 뿌리, 캐보니 향긋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래, 이 냄새야, 이것이 봄 냄새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일 년 만에 맡아보는 향기는 머리속이 개운하다.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봄나물을 캘 때면 나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촉촉한 흙을 만져보는 것도 좋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좋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이 목을 감싸고 둔덕에 앉아 있으면 고향처럼 편안하다. 봄이면 들로 냇가로 함께 하던 동무들, 그리고 정든 산하(山河), 고향이 그리워

   해마다 하는 나만의 행사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 충청도는 내륙지방이다. 이맘때가 되면 냉이, 씀바귀, 달래, 벌금다지, 지칭개, 돌미나리, 그야말로 천지간이 나물이다. 그중에도 어머니는 냉잇국과 씀바귀나물을 자주 상에 올리셨다. 농사를 지으셨던 아버지는 유독 씀바귀나물을 좋아하셨고, 나 역시 들나물을 많이 먹고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봄이었지 싶다. 그날도 대장간 집 딸, 필순이와 바구니랑 호미를 챙겨 나물 캐러 들로 나섰다. 산을 개간해서 일군 끝자락 비탈밭에 냉이와 씀바귀가 많았다. 우리는 재잘거리며 신명 나게 나물을 캐서 바구니에 담고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게서 나오지 못 혀” 

   돌아보니, 호랑이라고 별호가 붙은 키 작은할아버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물 캐는 재미에 보리 순이 뒤집히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거다. 가슴이 철렁했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고, 필순이의 큰 눈은 더 커졌다.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구니를 내동댕이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산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남 서방 딸인지 다 안다.” 

   악을 쓰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꾸중을 들을 걱정에 미적미적 놀다가 해거름에 집에 들어 가니, 바구니는 댓돌 위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물도 좋지만 보리를 망쳐서는 안 되지”

  아버지는 뜻밖에도 웃고 계셨다. 그 아버지 세상 떠나신지 이십여 년이다. 이제는 아버지를 닮아 나는 씀바귀나물을 퍽이나 좋아한다. 어쩌다 몸살이 나도 생각나는 음식은 씀바귀나물과 냉이 국이다. 냉이는 콩가루를 묻혀 된장국을 끓이고, 씀바귀는 살짝 데쳐서, 고추장과 식초, 약간의 설탕, 그리고 갖은 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무치면, 쌉싸래하면서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그것도 금세지은 따끈한 밥과 함께 먹으면 잃었던 입맛을 찾기에는 그만한 음식이 없지 싶다. 

  

  동의보감에 보면 ‘다년초 씀바귀는 성질은 차고 맛은 쓰나, 독이 없다. 오장육부에 나쁜 기운을 제거시켜주고 여름에는 더위를 먹지 않게 해주며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  쓴맛은 위를 자극하여 소화촉진을 돕고 입맛을 좋게 하여 봄의 나른함을 잊게 해 준다’라고 설명이 되어 있으니, 봄이면 찾아오는 춘곤증에 탁월한 식단이라 생각된다.

 

   한참을 캐다 보니 냉이와 씀바귀가 바구니에 가득하다. 질펀히 앉아 쉬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까치 한 마리가 깨 단을 뒤진다. 고개를 연방 쫑긋거리더니 ‘깍깍 까르르’ 노래 한 곡 들려주고 날아간다. 온갖 나물들이 돋아나는 싱그러운 봄, 입맛도 옛날로 돌아가고 마음도 고향으로만 간다. 질그릇처럼 투박해서 뿌리치기만 했던 아버지 손길도, 이제는 가슴 아리게 그립다. 고향이란 나서 자란 곳 별날 것도 없지만, 부모님과 형제가 있었고 유년의 추억이 있는 곳, 고향은 늘 그렇게 가슴 한곳에 남아 그리움으로 미소 짓게 하나보다.

   오늘은 결혼해서 가까이 사는 딸 불러, 씀바귀나물 무치고 냉잇국 끓여 봄나물 잔치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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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만난 클래식  -월간문학발표-


    솨 -아 바람이 분다. 

    드넓은 평야에 키가 큰 호밀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열한 살 자리 꼬마는 눈을 감고 그 움직임의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다. 그리고 이내 양팔을 벌려 지휘를 한다. 지그시 감은 소년의 얼굴은 마치 달콤한 꿈속을 거니는 듯 행복해 보인다. 시네라마로 다가오는 밀밭과 소년, 자연을 배경으로 한 영상은 감동으로 다가 왔다.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아빠와 첼리스트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특별한 음의 감각을 갖고 있는 소년 ‘어거스트’,  부모의 신분 차이로 외조부에게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라게 된 아이는, 입양을 거부하고 엄마 아빠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기차를 탄다.  레일 위를 달리는 바퀴소리도 음악으로 듣고, 주변에서 들리는 잡음까지도 곡(曲)으로 듣는다. 음악의 천재성을 가진 아이,  우여곡절 끝에  뉴욕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고, 마침내 공연장에서 애타게 그리던 가족을 만난다.  밀밭에서 바람소리를 지휘하던 소년은 청중을 향해 지휘봉을 힘차게 휘젓는다.  며칠 전에 본 ‘어거스트 러쉬’라는 영화 내용이다. 스토리는 단편 소설을 보는 듯 했지만, 내 가슴에 감흥으로 남아있는 것은 11세 소년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는 것이었다.

  잎들이 반짝이는 오월, 요즘에 내가 듣는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중의 봄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지만, 다시 한 번 음미하며 들어보니 느낌이 새롭다. 

 

  ‘신나는 봄이 와

  새들은 흥겨이 노래하며 반기고

  냇물은 산들 바람실어

  도란도란 흘러간다.’ 

 

  유럽서정시의 한 형식인 14행시 (소네트)가 소개하는 글에 있다.  봄 1악장, 빠르기를 지시하는 알레그로, 곡은 마치 맑은 호수에서 진주처럼 영롱한 물방울이 마구 튀어 오르는 듯, 생동감이 전해 온다.  찬란한 봄의 기쁨이 표출되어있고 생명이 숨 쉬는 움직임이 들린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활기찬 봄, 아름다운 음률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간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클래식, 우연히 만난 한편의 영화 덕에 무지했던 귀가 열린다.

 

  지난해 타계하신 내 스승님은 클래식음악을 즐겨 들으셨다. 브람스 교향곡 제1번,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바흐 , 쇼팽, 모차르트, 음반을 바꾸어 걸어드리면서도 건성으로 들었다.

  “음악을 듣다보면 그들의 영혼과 만나는 것 같아”

  곡을 들으시며 말씀하셨을 때도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무식꾼 그 자체였다. 

   초여름으로 가는 유월, 로테르담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알리는 기사가 일간지에 실렸다. 나는 작심을 하고 예매를 했다. 객석을 메운 청중은 숨을 죽이고 있다.  이윽고 지휘계의 젊은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야닉네제 세겐이 무대로 나와 인사를 한다.  창단 된지 90년이라고 했다. 오늘 연주하는 곡은 소련의 음악가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891~1953)의 교향곡 5번 D단조 작품47’이다.  악기를 안고 있는 70여명의 단원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1악장 서곡이 흐른다. 화려한 선율에 바이올린, 차분한 음색의 비올라, 그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이 홀을 감싸 안는다.  이어 경쾌한 왈츠에선 우아하게 춤을 추는 남녀 한 쌍이 그려진다.  중후한 음을 지닌 콘트라베이스, 그리고 첼로, 클라리넷, 트럼본 ,하프, 팀파니, 트럼펫, 그 외에 많은 악기들이 내는 다양한 음색에 나는 놀라고 있었다.  때로는 커다란 산이 다가오는 듯 장대하고, 때로는 거대한 파도가 질풍노도하며 달려오는 것 같이 웅장했다.  부드럽고 강렬하고 그런가하면 플루트의 맑고 깨끗한 소리는 깨어나는 아침 숲 속으로 나를 안내했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들리는 듯 내 마음은 더 없이 평화로워진다.  지휘봉을 손에든 야닉은 음을 따라 크고 작게 온 몸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단원들의 손놀림 또한 물결처럼 움직인다.  신비스런 현(絃)에 도취되어 시종일관 나는 눈을 감고 감상을 했다. 로테르담필하모니의 탄탄한 연주는 너무도 완벽한 앙상블이었다.

 

    오늘 연주되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은, 투쟁에서 승리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1937년 발표한 곡으로 ‘스탈린의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 이었다’라고 표기되어있다.  4반세기를 독재적으로 통치하던 시기,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소련을 핵시대로 이끈 그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이 작품 속에 녹아 있었다.  정치적 공포감, 애수에 찬 번뇌와 침통함이, 그런가하면 다시 희망과 기쁨, 그 모든 것이 4악장에 걸쳐 표현되어 있었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역정(歷程)이 들어있었다고 해야 할까. 두 시간여 공연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과 여린 감성까지도 섬세하게 표현 해내는 클래식, 그 마법과도 같은 곡을 만든 음악가들은, 일찍이 자연의 숨소리를,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었다.  앙코르곡까지 듣고 자리를 떠나며, 그들의 영혼과 만나는 것 같다고 하셨던 스승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였는지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요. 귀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소년 어거스트가 한 말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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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