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2일 석수 초등학교 꿈나무들의 입학식이 있었다.
입학풍경도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가슴에 손수건도 매달지 않았다.
그러나 초롱초롱 눈망울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공부도 열심히, 씩씩하고 착한 아이로 자라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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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수’의 정지용 문학관을 가다


 

    ‘넓은 벌 동족 끝으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가 즐겨 부르는 정지용의 시 ‘향수’ 앞부분이다.  초가을로 접어든 삽상한 바람이 부는 날, 충북옥천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을 찾았다. 


  1996년 원형대로 복원되었다는 생가는 옥천군 하계리에 단출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부엌하나, 안방, 건넛방, 툇마루, 그리고 초가지붕이 정겹다.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항상 문을 열어 놓았다.


  그의 아버님이 한약방을 했을 때 쓰였던 가구가 방 한곳에 그대로 놓여있고, 그 위에 언제 읽어도 좋은 시 한수 걸려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생가 앞에는 깔끔하게 조성된 문학관이 들어섰고, 뜰에는 정지용의 동상이 서있다.  실내로 들어가니 안내원이 반갑게 맞아 준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지용의 모형이 않자있는데,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옆에 앉아 촬영도 한다.  실내에는 작곡가 김희갑씨가 곡을 만들었다는 정지용의 ‘향수’가 박인수의 목소리로 은은하게 들린다.

  전시실에는 지용의 출생과 문학의 발자취가 차례대로 진열되어 있다.  지용연보가 있고 현대시의 흐름과 생전에 그의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1930년대는 시단에 중요한 위치에 올라 ‘청록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발굴했으며, 그 외도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1935년에 발간된 그의 시, 산문, 초간집이 있어 반가웠고, 영상실 에서는 휘문고 영어교사를 역임했던 시절, 이화전문대 교수 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를 낭송해 보는 기기가 문학체험 실에 있어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시인이 된 듯 낭송을 해보아도 좋다.


   정지용의 ‘향수’는 초기 작품 중에도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구체적으로 읊고 있고, 상상으로 그리는 세계가 아니라 자기 살던 고향을 그리움으로 읊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라는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망국의식과 함께 고향을 회복하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한다.   

  

  영문학자이기도 한 정지용은 말의 오묘함을 최대로 구사하는 천재성을 가진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0년대 구인회를 중심으로 동인 활동을 했으며, 사춘기부터 시를 썼다는 그는 일본 사람이 무서워 산으로 바다로 피해 다니며 시를 썼단다.  무엇보다도 일제식민지 시대 민족이 겪는 고통을 인내하며 살아간 지식인의 고뇌를 엿 볼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난 1902년은 조선의 말기로 일본에 의해 국운이 쇠퇴해 가는 시기였다. 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나라를 잃고 일본의 탄압 속에서 어려움이 많았던 세월이었다. 1950년 6 25전쟁이 일어나자 정치 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평양 감옥으로 이감된 후에 안타깝게도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그의 나이 49세였다.   

 

   매년 5월이면 지용제가 있고, 지용 백일장, 연변 지용 시 문학상, 다채로운 행사가 이곳 옥천에서 열리고 있다한다.  생가를 뒤로 하고 돌아가는 길, 그 앞에 여전히 실개천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시 ‘향수’는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실버넷뉴스 남순자 기자   mulori45@silver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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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발은 하얗고 조그마하다.

  소화를 돕는 다는 첫 번째 발가락아래, 상응점을 찾아 꼭꼭 눌러 드린다.

  “ 그만 됐다.” 나이든 딸 팔 아플까봐 그만 하라 하신다. 어머니는 올해 87세시다. 요즘 노환으로 고생하시어 마음이 아프다. 영영 떠나시는 줄 알고 놀란 적도 몇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헌데 이번에는 심상치가 않다. 언니랑 여동생, 우리는 주중에도 주말에도 안산 어머니 곁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말동무 해 드린다. 마흔셋에 막내아들을 낳으셨는데, 고맙게도 그 아들 덕에 말년을 편안하게 지내시고 있다.  남들은 편찮으시다 하면 ‘수를 하셨네.’ 하지만 내 가슴은 무쇠 덩이를 얹혀놓은 듯 무겁다. 어느 자식이 부모님 환후(患候)에 마음 편할까만 나는 유독 지은 죄가 크다.

  “엄마 죄송해요. 늘 걱정만 드리고 ”

  “팔자인걸, 아이들이 잘 컸으니 이젠 괜찮을 거다. 그리고 울지들 마라. 살만큼 살았고 때가 되어 가는 거니”

어머니를 중심으로 모두 둘러앉았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다. 아플 때마다 너희가 잘해주어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와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 동생도 나도 울음보가 터졌다.

  삼년 전 만해도 여름휴가를 함께 하셨다. 그해는 딸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땅으로 떠났다. 멀지 않은 충청북도속리산, 그곳은 돌아가신 아버님과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어머님께서 즐겨 드시는 다슬기국은 법주사 인근에서 빠지지 않는 식단이다. 화양계곡에선 백숙을, 신탄진 묵 마을도 들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식단을 찾아 일정을 잡았다. 자그만 키에 하얀 모시 한복을 입은 어머니는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고 단아 하셨다. 법주사 앞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할머니 젊으셨을 땐 참 고우셨겠어요.” 식당 아주머니 말이다. 방금 지은 따끈한 밥에 다슬기와 시래기를 듬뿍 넣은 국이 한 그릇 더 나왔고, 친정어머니가 생각난다며 주방 아주머니는 찬도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었다. 어머니는 맛있게 드셨다. 법주사 경내를 보려면 오리 숲을 걸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어머니는 무리일 것 같았다. 무슨 수가 없을까 궁리를 하던 차에, 119구급차가 보였다.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청하니 흔쾌히 승낙해준다. 긴급차량이라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덕분에 우리 딸들은 효도 할 수 있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화양계곡에서 먹는 백숙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가는 곳마다 어른을 우대하는 예의와 정이 있어 ‘살기 좋은 세상’ 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천(山川)도 수려하고 인심도 좋고 ,어른과 동행하니 우리도 대접을 받는다. 괴산을 지날 무렵, 장독대에 늘 심으셨던 빨간 맨드라미를 보시곤 반갑다하셨다.

“ 형님 형님 시집살이 어떱디까, 애고 애고 말도 마라, 시집살이 눈치 살이, 고추 당초(唐椒) 맵다 한들 시집살이 더 맵더라.”  어머니는 뒤 좌석에 앉으셔서 노래를 하셨다. 우리는 따라 부르며 박수를 쳐드렸다.


  시계가 자정을 알린다. 그만들 가라고 손짓을 하신다. 자식살림을 염려하심이다. 위급한 상황이오면 바로 연락을 하겠다는 막내 남동생의 말을 듣고 나는 차에 올랐다. 칠흑같이 캄캄한 안산고속도로- 내 마음만큼 어둡고 적막했다. 어머니 없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언제나 따듯하게 보살펴 주셨다. 덕분에 아이들도 다 자랐고 나도 건강하다. 그 은혜를 말로 어찌 다하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큰 사랑 때문이리라. 어머니는 내 삶에 버팀목이었고 든든한 후원자였다. 어머니가 생전에 계시다는 것, 그것은 분명 홍복(洪福)이었다. 이른 새벽 전화가 울린다. 혹시나 하여 가슴이 내려 않는다. 수화기를 드니 막내다.

  “ 누나, 엄마드릴 좋은 약 없을까. 영양주사를 삼일 간격으로 놔드리면 어떨까. 엄마가 돌아가신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해, 한 삼년만 더 계셨으면 좋겠어.” 말끝을 흐린다. 젖이 모자라 암죽으로 키운 막냇동생, 내 등에 오줌을 싸대더니 어머니를 생각하는 신통한 말에, 한동안 찡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막내 말대로 다시 한번 해 보자. 우리는 합심을 했다. 언니는 보약을, 나는 영양제를, 동생은 순한 주사약을, 막내 댁은 부드러운 곰국을, 부드러운 빵과 인절미도 마련하고 어떻게든 입맛을 찾으셔야 한다는 생각이다.

  “엄마 막내가요 돌아가실까 봐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데요. 우리도 그렇고요, 힘내셔서 일어나셔야 해요.” 그러기를 달 반 어머니는 차도가 있으셨다. 요즘에는 주말에만 찾아뵙는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자네 덕이야”

  “ 제가 뭘요. 형님들이 하시면서” 막내 올케는 말한다. 연세가 있으셔서 얼마나 더 우리 곁에 계실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다시 웃음을 찾으셨고 거동도 하신다. 내년 봄에는 막내가 만들어 드린 미니 옥상 밭에 상추며 쑥갓, 오이 고추, 그 예쁜 푸성귀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요즘 내가 알게 된 것은 효심으로 드리는 약은 효과가 두 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의 수명도 자식의 정성에 따라 연장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10월초 새털구름이 멋지다. 오늘은 내 마음도 깃털처럼 가볍다. 다들 모이는 주말,  살이 오른 꽃게를 샀다.

  “ 어머니 우리 왔어요.” 손을 잡으니 빙그레 웃으신다.  나는 가슴이 저려와 어머니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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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 중순, 봄비가 내린다.

  아파트 주변에 있는 개나리가 꽃 피울 채비를 한다. 이맘때가 되면 마음 저편에 접혀있던 아픈 기억이 나를 흔들어 댄다. 1980년 봄, 그날도 가랑비가 내렸다. 큰 트럭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종알대는 꼬맹이들과 충청도 고향에서 서울로 출발했다. 시원하게 뚫린 중부 고속도로 갓 길엔 노란 개나리가 봄비를 머금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결혼생활 9년. 딸아이 셋과 나를 두고 그는 급하게도 먼 길을 떠났다. 부부로 인연을 맺어 자식을 낳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아니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며 변함없이 살라는 말은 혼례서약에 빠지지 않는 약속의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두 사람의 인고(忍苦)를 감당해야 하며,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임을, 우리는 때로 잊고 산다.

  슬픔은 남아 있는 자의 몫이라고 했던가. 그의 빈자리는 어린것들을 하루아침에 아빠 없는 아이들로 만들어 버렸다.   

“울고 싶을 땐 실컷 울어라. 그러나 조만간 울음을 그치고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아라. 좌, 우, 위아래를, 경거망동해선 안 되며 너를 바라보는 눈망울을 생각해라. 침착하게. 침착하게. 침착하게......”침착 하라는 말을 세 번이나 하신, 내 은사님은 소식을 듣고 긴 편지를 보내주셨다. 비로소 나는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란 언제 어떻게 올지 그 누구도 모르는 일, 조금 일찍 떠났을 뿐이라고 납득은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년 탈상을 하고, 시어머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나는 그의 흔적을 뒤로했다.

   이곳 시흥은 서울이라고는 했으나 변두리였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서울과 안양을 오가는 차들의 소음만이 간간이 들렸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조각배, 내 마음은 그랬다. 그로부터 나는 일하는 엄마가 되었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마음도 몸도 바빴다. 그러나 가슴엔 소망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잘 자라 주는 것과, 내가 시작한 일이 아이들과 함께 자라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 무렵, 우연히 박완서 씨의 단편,‘엄마의 말뚝’을 읽게 되었다. 자전적인 소설로 그분의 어머님은 자녀의 장래를 위해 대처(大處)로 나왔다. 삯바느질로 장만한 산꼭대기 허름한 집, 그 집은 자식을 잘 길러 보겠다는 엄마의 굳은 말뚝이 깊게 박혀 있었다. 시대는 달랐으나 뭔가 나에게 한 수 던져주는 것 같았다.

  우선 밝게 컸으면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어린이날은 하던 일을 놓고 아이들과 함께했다. 당시 세종 문화회관 대강당은 오월이면 어린이를 위한 뮤지컬 공연을 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연극을 관람하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파랑새, 피터 팬, 이상한 나라 앨리스, 그 일은 여러 해 계속되었다. 지금은 작고한 분이지만 연극배우 추송웅 씨가 기저귀를 찬 아기 역할을 해서 관객의 박수를 받았고, 가수 윤복희 씨는 마녀로 분장해 열연을 했다. 돌아오는 길엔 조잘조잘 말들이 많았다.

  학기 초에는 잘 보살펴 달라는 편지를 담임선생님께 썼으며, 방학이 되면 엄마가 하는 일을 함께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를 태운 조각배는 그런대로 순항을 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한다고 하지만. 어떤 커다란 섭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며, 어려울 때가 있으면 그 후에 기쁨을 꼭 마련해 놓으신다는 위로의 말을 고향 선배님은 늘 해주셨다. 덧붙여 그대는 잘해낼 수 있을 거라며 힘찬 응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응원에 힘을 얻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도 씩씩하게 털고 일어섰고, 나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도 힘이 생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내 주위에는 따듯한 분들이 있었다. 오랜 세월, 힘들 때 기댈 수 있었다.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뿐이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열심히 일하고 당당하게 살아라.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로운 태양이 솟아오른다.”성년이 된 지금도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말이다. 

                                                              

노란 개나리가 그 동안 몇 번이나 피고 졌는지, 둘째가 결혼과 함께 보금자리를 찾아갔고, 큰아이는 조각을, 막내는 무역 일을 하고 있다. 영원한 타향이 될 거로 생각했던 이곳이 이제는 정이 들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내 삶을 격려해 주었던 사람들, 그 마음을 나는 잊지 못한다. 봄볕이 화사하다. 아파트 주변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다. 이제는 정녕 너를 슬픈 마음으로 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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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내 인생에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다.

   그것은 흐렸던 나의 젊은 날을 다시 맑음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때로 평범한 일상에서 느닷없이 커다란 전환점을 긋고 간다.  삼십대 중반, 한쪽 날개를 잃은 그 혹독한 시기를 나는 책과 함께 보냈다. 이야기책을 좋아 하셨던 아버지 덕에 쉽게 책을 접하긴 했지만,  급작스럽게 바뀐 환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막막함을 견디기 위한 방편이었다.

  

   자주 서점을 찾았다. 뭔가 실 날 같은 삶의 끈이라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만난 책이 당시 철학 교수이셨던 김태길 교수님의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라는 책이었다.  평범한 일상과 인간의 삶, 그 광대한 분야를 심도(心度) 있게 다루고 있었다. ‘삶이란 어떤 환경에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일이 있다’는 글귀를 읽으며, 희미하게나마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기 시작 했다. 그 책은 나의 소중한 보물로 책장에 꽂혀있다.

  나는 책이라는 창을 통해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동안 책을 가까이했다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은 단 한 가지의 덕목(德目)이다.

   이 십 여년의 세월을 생업에 종사하며 틈틈이 책을 읽었다. 제목이 좋아서 아니면 서문에 끌려서, 혹은 일간지에 소개된 신간을 골랐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엿보기도 하고 그들의 생각을 읽어갔다. 책장을 넘기며 웃고 울고 나도 모르게 내 가슴은 감동으로 파도를 쳤다. 그리고 밑줄을 그었다. 점차 글을 쓴 작가마다 독특한 향기가 있음도 알게 되었고 저마다 색채가 느껴졌다. 아름답고 오묘한 언어에 매료되어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하여 수필가란 이름을 얻은 지 십년이다

 

  어느 해인가 과천 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본관 입구 잔디밭에 큰 사람이 서 있었다.  7척 장신의 사람은 외국작가가 만든 조형물이었다. 그 사람은 미술관을 뒤로하고 먼 산을 바라보며 ‘어-어-어’ 하고 리듬이 섞인 소리를 간헐적으로 내고 있었다.  제목을 보니 역시 ‘노래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노래라기보다는 마치 세상을 향해 하고픈 이야기가 많아 계속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노래하는 사람처럼 세상을 향해 하고픈 말이 많은 것인가.  그때 내 가슴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림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풀어갔다. 딸아이들을 보며 짠한 마음을 썼고 그 아이들을 보며 내 소망을 써 내려갔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름대로 사유(思惟)의 뜰을 거닐며 침묵했다.  한을 풀 듯 가슴속에 고인 물을 퍼냈다.  나의 글이 논픽션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임을 변명하지 않는다.  고인 물을 퍼내면 맑은 물이 고이듯, 내 마음속에 있던 앙금은 퍼 낸 만큼 맑은 물로 바뀌고 있었다.

   사회성이 부족해 편협했던 성격도 조금씩 너그러워졌다. 계절 따라 피는 꽃들, 창밖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들,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인근에 있는 산행으로 하루를 연다. 낙엽을 밟으며 오르는 산은 늘 새롭다.  다람쥐 한 쌍이 겨울 준비를 하는지 부산하다. 나도 계절로 치면 가을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안개가 자욱한 산길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  허나 혼신을 다해 쓴 글이 활자화되면 그 희열이 기쁨으로 이어진다. 

   글감은 일상에서 특별히 경험하게 되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데, 인간의 정이 느껴지는 이웃 이야기, 혹은 따듯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글이 쓰고 싶어진다.  어떤 주제가 정해지면 며칠이고 생각에 잠긴다.  너럭바위에 앉아 혹은 잣나무 사이를 거닐며 글감을 정리한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떻게 맺을 것인가, 그런대로 초안이 잡히면 글쓰기를 시작한다. 

  유머가 있고 위트가 있는 글, 그리고 해학과 품격이 있는 글을 쓰고 싶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이다.  다만 독자가 내 글을 읽으며 한번쯤 빙그레 웃어만 준대도 나로서는 감사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청명하고 맑은 날의 글을 쓰고 싶다. 살아있는 것이 무엇이고 기쁨이 무엇인지, 그것들과 대화하고 싶다. 우리네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이 울림으로 다가오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