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의 도시 암스테르담 -한국수필 발표-
나는 지금 네덜란드 운하(運河)의 도시 암스테르담에 와있다.
5월 중순, 아침햇살에 깨어나는 도시를 본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는 암스테르담은 안개에 쌓여 신비스럽도록 아름답다. 반짝이는 물, 동화 속에 나올듯한 예쁜 집들이 강을 따라 마주하고 서 있다. 아치형다리가 그림처럼 놓여있고, 그 아래 조그만 나룻배들은 물길을 따라 묶여있다. 파란 하늘, 두 팔을 벌린 듯이 서 있는 나무와 강가에 펼쳐진 녹음, 그런가하면 창문마다 피어있는 꽃들, 그림에서만 보았던 이 청한(淸閑)한 풍경에 나는 잠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작곡을 했다는 ‘비발디의 사계’ 봄, 1악장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회사일로 출장을 가는 막내를 따라 오게 된 며칠간의 네덜란드여행이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있는 ‘에스텔지아’ 호텔, 이 강가에 여정을 푼 것은 딸의 배려였다. 로비에서 도시의 생김을 소개하는 지도를 받아들고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지형은 우리나라 쥘부채 모양과 비슷한데, 거미줄처럼 돌아가며 촘촘히 그려진 것이 모두 물길이란다. 과연 물의 나라였다.
13세기 초, 암스텔강 하구에 댐을 만들어 조성된 도시라하여 암스테르담, 165개의 운하가 흐르고 1000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단다. 암스테르담과 라인강 하류인 레크강을 연결하는 길이는 80km인데 가장 큰 뱃길이라고 했다. 네덜란드는 해수면 보다 25프로가 낮은 땅이라고 한다. 그래서 국명도 원어로 ‘낮은 땅’이다.
1953년 겨울, 폭풍과 함께 몰아닥친 파도는 해안지역을 덮어 제방은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과 가축, 농지가 사라졌단다. 이를 계기로 댐, 제방, 수문, 운하, 건설 등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들은 세계최고의 수리공학(水利工學) 기술을 바탕으로 한 ‘델타프로젝트’(Delta Project)를 운영하여 오늘날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높은 파도로부터 사람을 지키기 위해 델타지역에 7개의 댐과 방조제가 건설되었고, 현재 물 관리에 많은 돈을 들여 홍수와 생태계를 회복하는데 쓴다고 한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바다보다 낮은 땅을 어떻게 이토록 멋진 도시로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도시 안에는 60개 이상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어 다양한 문화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안내서와 설명하는 글을 딸은 꼼꼼히 읽어 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유난히 키가 컸다. 그래서 그들은 성큼성큼 걷는다. 경쾌해 보이고 활동적으로 보인다. 저마다의 개성 있는 패션은 멋이 흐르고, 낯선 이방인에게도 눈만 맞으면 웃는다. ‘트램’이라는 전철이 도시 한복판을 누비고 택시가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간다. 급한 것이 없다.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데, 도시 전체에 전용도로가 따로 있다고 한다. 인형처럼 생긴 금발의 아가씨는 연인과 나란히 손을 잡고 자전거를 탄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나이에 상관없이 어깨를 걸거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는다.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에서, 처음 보게 된 그림에 잠시 빠져있기도 했지만, 머리가 하얀 노부부들이 어깨를 감싸고 진지하게 감상하는 모습에 나는 더 눈길이 갔다.
네덜란드 여객기 (KLM)를 탑승하면서 내 머리 속에 그려진 것은 풍차였다. 이곳에서 13km 떨어진 ‘잔세스칸스’, 풍차마을로 딸과 나는 출발했다.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풍경을 간직한 곳이라 하더니, 호수와 목조건물이 눈앞으로 다가선다. 아름답다는 표현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카메라를 들고 아무 곳이나 촬영을 해도 그림이 된다. 드디어 ‘잔 강’이 흐르는 기슭에 위용을 자랑하듯 풍차가 서있다. 가까이 보니 날개도 높이도 엄청나다. 때마침 풍차 두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바람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위풍당당하다. 저지대의 물을 퍼 올리기도 하고 호밀과 겨자씨를 빻기도 했다는 풍차, 이 나라의 오랜 역사가 느껴졌다. 정미소 같은 분위기의 풍차내부를 구경하고, 치즈를 만드는 집을 들러 한 조각 맛을 보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광을 가슴에 담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작아져가는 풍차를 보니 미술관에서 본 고흐의 그림 ‘바람 이는 풍차’가 클로즈업되었다.
썬 그라스를 끼고 막내딸은 운전을 한다. 나를 태우고 내비게이션 안내를 받으며 네덜란드 땅을 거침없이 달린다. 잦은 외국 출장에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는 당부는 했지만, 언어도 길도 이토록 능통할 줄이야.
“우리 막내, 참 멋지다”
“엄마, 이제야 아셨어요.” 우리 모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오늘은 회사업무로 알게 된 얀씨집에 점심초대를 받아가는 길이다. 아침에는 비가오더니 금세 뭉게구름이 하늘 끝자락에 걸려있다. 시원하게 뻗은 외각도로를 한 시간 남짓 달렸다. 숲이 우거진 길을 뚫고 도착한 곳은 ‘린드’라는 마을이다. 푸른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있고 아담한 이층집 앞에 얀씨부부가 나와 있었다. 시원한 눈을 보아도 서구적 매력이 넘치는 부인, 중소기업 사장님이라는데, 얀씨는 키도 크고 체격도 컸다. 딸의 말대로 인상이 넉넉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나를 보자마자 덥석 안는다. 순간 나는 당황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곳은 사람들은 안고 뺨에 키스까지 하는 것이 인사법이란다. 보라색수국이 핀 꽃밭을 지나 거실로 안내되었다. 오십대 중반인 부부는 자녀 둘을 키워 독립을 시키고 호젓하게 살고 있었다. 두툼한 책을 내놓으며 자기네 집 역사라고 했다. 책장을 넘기자 아이의 탄생부터 오늘이 있기까지의 세월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흙장난하다가 잠든 모습, 상패를 받는 사진과 졸업사진, 인상적인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지을 때, 꼬마들이 첫 삽을 뜨는 장면이다. 가족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점심이 끝나고 나는 녹차를 마시며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딸은 옆에서 통역을 한다.
“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입니다. 그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요.” 그리고 그는 웃는다.
부인을 끔찍이도 아끼는 분이라는 이야기는 딸을 통해들었다. 요리를 못하는 아내를 위해 식사준비는 주로 얀씨가 한다는 것, 아침잠이 많은 아내와는 남남이 되었다가 퇴근 후에 만난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바라보는 눈길, 이들에게서 오는 느낌은 신뢰와 사랑이었다. 마치 나는 너를 위해 살고, 너는 나를 위해 사는 그런 삶, 내 마음까지 행복해졌다.
암스테르담에 오면 꼭 운하 크루즈를 하라는 얀씨의 권유에 해질 무렵 우리는 유람선을 탔다. 불이 켜진 암스테르담의 밤풍경은 환성이 나올 정도로 로맨틱했다. 꽃이 가득한 노천카페에서 한잔하며 유쾌하게 웃는 사람들, 허리를 감싸 안고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들, 강을 따라 한 시간 여 야경을 감상했다. 배를 탄 사람들은 삼십 여명,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다. 머리를 뒤로 넘긴 말쑥한 청년들은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칸초네 ‘싼타루치아’를 멋지게 불렀다. 우리 모두는 손뼉을 쳤고 ‘부라보’를 외쳤다. 낭만이 흐르는 선상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며칠간의 여행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헤이그에 있는 ‘마드로담’ 이다. 이곳은 암스테르담의 명소를 소인국처럼 축소해 놓은 곳인데, 댐을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했다는 소년 ‘한스’의 모형이 입구에 있어 초등 때 읽었던 기억이 났다. 네덜란드 하면 떠오르는 꽃 튤립은, 축제가 끝난 뒤여서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지만 , 안네 프랑크의 집, 음양의 마술사 렘브란트, 풍속화를 그림 베르메르의 그림을 국립박물관과 미술관 에서 만날 수 있는 안복을 누렸다.
2002년, 우리나라 축구를 빛내주었던 히딩크의 고향 네덜란드, 자유와 관용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 그들은 유머가 있고 친절했다. 낭만이 흐르는 암스테르담, 나는 오래도록 이 도시를 잊지 못할 것 같다.
200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