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초 , 신경정신과 전문의 송수식 박사님을 뵐 수 있었다.
한국 노인들의 정신건강을 하나 하나 짚어 주셨다.

실버넷 뉴스 기자가 된지 1 년,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었다.

 


 

Posted by 물오리


딸들과의 제주도 여행 

 



오설록 녹차박물관



Posted by 물오리

딸이 더 좋아

수필[Essay] 2011. 3. 5. 03:31
 

 

  2010년, 우리 사회가 딸을 더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고 속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딸만 셋을 키운 내 젊은 시절이 떠올라서다. 어디 나뿐이랴, 딸만 둔 여인들은 나처럼 미소를 짓지 않을까 싶다. 

  결혼을 하고 첫 딸을 낳았을 때, 시어머님은 살림밑천이라고 좋아하셨다. 그리고 두세 살 터울로 둘째, 셋째가 태어났을 때도, 그 시절 인기가 많았던 가수 그룹을 운운하시며 ‘안 시스터즈를 만들면 되겠네.’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의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여 딸만 낳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지 살피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시누이든, 손위 동서든, 누구든지 한마디만 하면 바로 대항할 자세로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이 사람이 누가 뭐란다고 그래, 마음 편히 갖고 우리 딸들 잘 기르자 구.”

  좌불안석인 나에게 남편이 해준 말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때 경험했다.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웃음만 나온다.

나의 시어머님은 보기 드문 호인(好人)이셨다. 시댁과의 갈등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어머님 덕분에 마음고생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늘 인자하셨고 품성이 어진 분이었다.  맛나게 미역국을 끓여주셨던 일, 생명의 소중함을 일러주시며 언짢아하는 내 마음을 토닥여 주셨던 일, 세상 떠나신지 십여 년이 넘었지만 생각하면 그리운 마음뿐이다.

 

  우리나라 남아선호사상은 그 뿌리가 깊다. 고려시대 이후에 확립되기 시작하여 유교문화의 융성과 1700년 중엽 이후, 철저하게 계승되었고, 가계계승을 위한 전통가족제도가 원리였다. 장자는 결혼하여 부모와 함께 살면서 봉 제사(奉祭祀)를 받들고, 가족제도가 부계(父系)로 이어지면서 남아 선호사상은 더욱 굳혀졌다. 1970년 영화로 상영되었던 ‘이조여인잔혹사’는 작고한 신상옥 감독의 작품이다. 봉건적인 인습에 희생된 조선시대여인들의 이야기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이란 악습으로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들이 받는 수모와 핍박은 처절할 만큼 잔혹했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한일인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이 땅의 여인들은 아들을 원했다. 나 역시 남편을 닮은 아들 하나 얻기를 소원했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막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사주(四柱)를 잘 본다는 철학관을 찾아갔다. 아들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다. 허탈해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딸도 잘 키우면 아들 노릇 합니다.’ 했다.  

  1980년대, 아들을 둔 사람은 그야말로 든든한 노후보험이라도 들어 놓은 것처럼 흐뭇해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들 밥은 편히 앉아서 받아먹고, 딸 밥은 서서 먹는다.’라는 말도 있었다. 

어느 모임을 가든, 또 조금 안면(顔面)을 트고 나면 사람들은 물었다.

“ 몇 남매 두셨어요?”

“딸만 두었습니다.”라고 답하면 혀를 끌끌 차거나 동정어린 눈으로 나를 보곤 했다.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남매를 두었어요.’ 하는 말로 대신해버린 적도 있었다. 그간에 딸들을 키우며 어쩔 수 없이 웃어넘긴 일은 부지기수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잘했다는 상도 받아오고 칭찬도 듣고, 여느 집처럼 자식 키우는 재미에 나는 서운함을 잊어갔다. 사춘기가 지나고 딸들이 예쁜 숙녀로 자랐을 때, 우리 집은 달라지는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화병에 꽃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것은 딸들의 남자친구가 주는 꽃이었다. 빨간 장미로 시작하여 핑크빛 튤립, 노란 후리지야, 하얀 안개꽃, 향기나는 백합까지, 시들만 하면 번갈아 들고 들어 왔다. 꽃만 피는 것이 아니라, 딸아이들도 곱게 피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흐뭇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딸아이들과는 마음이 잘 통했다. 친구도 이런 친구가 없다. 쇼핑도 함께하고, 여행도 함께 간다. 그것은 딸을 둔 엄마들만의 특별한 혜택이지 싶다.

  요즘은 시집간 딸 곁에 사는 것이 편하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한다. 김치를 담아 택배로 보내고, 며느리에게 전화만 해야 하는 시대라고 친구들은 말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아들은 품 안의 사랑이고, 딸은 영원한 사랑이란다. 농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세태를 잘 반영하는 것 같다. 

 

  시인 이향지씨는 ‘반달’을 작사 작곡한 윤극영 선생님의 며느리다. 생전에 며느리들로부터 아버님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아버님을 ‘아버지’로 불렀고, 그 선생님도 당신의 아들과 딸처럼, 며느리를 쉰이 되도록 이름 ‘향지’로 불렀단다.  불필요한 격식을 걷어버림으로 더욱 가까워진다는 이 시인은, 그 아버지를 사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 딸이 결혼하면 그 집 며느리요, 아들이 결혼하면 내 집 며느리다.  딸, 아들, 며느리, 차별 없이 이름을 부른 것은, 그 선생님만의 특별한 사랑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안이 환했던 딸들은 혼인을 했다. 가까이 살아 손자 손녀 안겨주고 오순도순 산다. 내목소리만 들어도 컨디션 지수(指數)를 짐작하는 둘째 딸, 시시때때로 어미생각을 해주는 딸아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온 것이라 읊은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 모두 그 소풍 끝나면 떠나는 인생일 것인데,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떠하랴, 주님이 나에게 주신 소중한 생명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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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무대

수필[Essay] 2011. 3. 5. 03:28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여기 오페라 하우스예요. 지금 출발하세요.”

“그래, 알았다.” 나는 서둘러 서초동에 있는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신년 뮤지컬, 바리- 잊혀진 자장가.’라고 쓰인 현수막이 극장외벽에 걸려있다. 나는 딸의 안내로 객석에 앉았다.  조각과를 나와 무대미술2년 과정을 마치고 제작팀과 함께 한 작품 ‘바리데기’ 공연이다.

  “ 무대 장치를 잘 보세요.  특히 2부에서는 볼거리가 많아요.”

   팜플랫 속에 조그맣게 나와 있는 딸에 이름을 발견하고 나는 코끝이 찡해왔다. 극장을 울리는 음악과 함께 웅장한 무대가 열렸다. 커다란 고분을 연상케 하는 왕궁이다. 녹슨 청동거울은 미로를 상징하는 것으로 조상과 만나는 통로란다. 바리공주는 전래의 바리데기, 아버지 오구왕이  병이 들자 생명수가 있다는 저승을 찾아 천신만고 끝에 신령의 물을 얻어 아버지를 살리는 줄거리다. 바리는 착한 마음과 아버지를 구한 효성심으로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 일면 ‘오구풀이’ 로도 부리며 전국으로 전승되는 사설 무가이다.  오늘의 어려운 현실과 접목하여 버려진 자가 구원하는 희망의 세상, 신년벽두에 주인공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계기로 삼고 싶어 만들었다는 당장의 해설이다.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하나 둘 등장한다. 화려한 조명과 감미로운 음향, 이야기가 전개될 때마다 큰 무대가 아래로 사라졌다가 다시 올라오고 빙그르르 돌면서 상황이 바뀐다. 기울어가는 왕궁과 폐허의 도시는 암울한 회색과 진 밤색으로 표현하였다. 2막에 쏟아지는 폭포아래 방망이질을 하는 바리공주, 그 장면은 마치 떨어지는 물방울이 곧바로 튀어 오를 듯 리얼하다. 생명수가 있는 서천 땅, 이슬을 머금은 숲 속에는 영롱한 옥 바위가 서있고 삼천년 만에 열려서 득도한 사람만 먹는다는 천도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무대는 참으로 웅장했다. 바위 길이가 9m 가 넘어서 작업이 어려웠다고 하더니 왕궁이며 암벽을 어찌 만들었는지, 생각했던 것 보다 어려운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막이 오를 무렵, 감기가 들더니 계속 기침을 하며 다닌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찰흙으로 만들기 과제였다. 연꽃 잎 위에 청개구리가 앉아 있었다. 물감으로 색칠까지 하여 모양새가 어찌나 정교하던지 우리 내외는 놀라고 있었다.

  “ 우리 딸 재주가 있구나.” 아빠의 말이다.

순한 줄만 알았던 그 꼬마가 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부터였다. 관심이 있는 놀이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조르기 시작하면 해결될 때까지 고집을 부렸다. 회초리를 들기도 여러 번이었다. 도망이라도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조그만 입을 꼭 다물고 피하지를 않아 끝내 엄마를 울렸던 아이, 그러나 자라면서 그 고집은  심심치 않게 상장과 상패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대학 입시를  앞에  놓고 교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끝내 조각과를 지망했고 나는 또 딸아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조각전에서 입상을 한 것도 그 무렵이다. 한참 예쁘게 꾸밀 나이에 옷차림은 물감 칠에 왁스, 언제나 먼지투성이다. 여자아이가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분야를 스스로 구축해 가기엔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무대 미술 2년 과정을 자기 힘으로 해결했으니 공부하랴 일하랴 미처 씻지도 못하고 곯아 떨어졌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자식도 키워보면 제각기다. 재능도 있고 하고자하는 열의도 확고한 아이를 시원하게 밀어주지 못하는 것이 나는 늘 미안했다. 그러나 묵묵히 자기 길을 가고 있었다. 그것은 과묵한 아빠의 성격을 닮은 것 같았다.  바리 작품 끝내고 소극장 무대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삼월에 막을 올린단다. 이제 무대 미술 책임자로 첫출발이다.  높은 콧대만큼 주장도 신념도 확실해 잘 해내리라 믿는다.

  “경제적으로 밀어주지 못해 미안 하구나.”

  “엄마, 환경이 좋았다면 열심히 안했을지도 몰라요.”

   하긴 너희들이 없었다면 난들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이번 공연에 거의 한달을 매달리고 곤하게 잠이 들었다.  손을 만져보니 굳은 살 투 성이다. 꼬마 때 그 솜씨가 무대를 꾸밀 줄이야, 미술과 무대를 총괄하는 종합 예술가, 그리고 더 큰 세계로 나가 공부하는 꿈을 키운다. ‘ 네 꿈을 이루어 내리라 엄마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큰 딸 힘 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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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의 도시 암스테르담  -한국수필 발표-


  

   나는 지금 네덜란드 운하(運河)의 도시 암스테르담에 와있다.

   5월 중순, 아침햇살에 깨어나는 도시를 본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는 암스테르담은 안개에 쌓여 신비스럽도록 아름답다.  반짝이는 물, 동화 속에 나올듯한 예쁜 집들이 강을 따라 마주하고 서 있다.  아치형다리가 그림처럼 놓여있고, 그 아래 조그만 나룻배들은 물길을 따라 묶여있다.  파란 하늘, 두 팔을 벌린 듯이 서 있는 나무와 강가에 펼쳐진 녹음, 그런가하면 창문마다 피어있는 꽃들, 그림에서만 보았던 이 청한(淸閑)한 풍경에 나는 잠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작곡을 했다는 ‘비발디의 사계’ 봄, 1악장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회사일로 출장을 가는 막내를 따라 오게 된 며칠간의 네덜란드여행이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있는 ‘에스텔지아’ 호텔, 이 강가에 여정을 푼 것은 딸의 배려였다.  로비에서 도시의 생김을 소개하는 지도를 받아들고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지형은 우리나라 쥘부채 모양과 비슷한데,  거미줄처럼 돌아가며 촘촘히 그려진 것이 모두 물길이란다.  과연 물의 나라였다.  

   13세기 초, 암스텔강 하구에 댐을 만들어 조성된 도시라하여 암스테르담,  165개의 운하가 흐르고 1000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단다. 암스테르담과 라인강 하류인 레크강을 연결하는 길이는 80km인데 가장 큰 뱃길이라고 했다.  네덜란드는 해수면 보다 25프로가 낮은 땅이라고 한다. 그래서 국명도 원어로 ‘낮은 땅’이다.     

  1953년 겨울, 폭풍과 함께 몰아닥친 파도는 해안지역을 덮어 제방은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과 가축, 농지가 사라졌단다.  이를 계기로 댐, 제방, 수문, 운하, 건설 등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들은 세계최고의 수리공학(水利工學) 기술을 바탕으로 한 ‘델타프로젝트’(Delta Project)를 운영하여 오늘날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높은 파도로부터 사람을 지키기 위해 델타지역에 7개의 댐과 방조제가 건설되었고, 현재 물 관리에 많은 돈을 들여 홍수와 생태계를 회복하는데 쓴다고 한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바다보다 낮은 땅을 어떻게 이토록 멋진 도시로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도시 안에는 60개 이상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어 다양한 문화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안내서와 설명하는 글을 딸은 꼼꼼히 읽어 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유난히 키가 컸다. 그래서 그들은 성큼성큼 걷는다.  경쾌해 보이고 활동적으로 보인다. 저마다의 개성 있는 패션은 멋이 흐르고, 낯선 이방인에게도 눈만 맞으면 웃는다.  ‘트램’이라는 전철이 도시 한복판을 누비고 택시가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간다.  급한 것이 없다.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데, 도시 전체에 전용도로가 따로 있다고 한다.  인형처럼 생긴 금발의 아가씨는 연인과 나란히 손을 잡고 자전거를 탄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나이에 상관없이 어깨를 걸거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는다.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에서, 처음 보게 된 그림에 잠시 빠져있기도 했지만, 머리가 하얀 노부부들이 어깨를 감싸고 진지하게 감상하는 모습에 나는 더 눈길이 갔다. 

  네덜란드 여객기 (KLM)를 탑승하면서 내 머리 속에 그려진 것은 풍차였다.  이곳에서 13km 떨어진 ‘잔세스칸스’, 풍차마을로 딸과 나는 출발했다.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풍경을 간직한 곳이라 하더니, 호수와 목조건물이 눈앞으로 다가선다.  아름답다는 표현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카메라를 들고 아무 곳이나 촬영을 해도 그림이 된다. 드디어 ‘잔 강’이 흐르는 기슭에 위용을 자랑하듯 풍차가 서있다.  가까이 보니 날개도 높이도 엄청나다.  때마침 풍차 두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바람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위풍당당하다.  저지대의 물을 퍼 올리기도 하고 호밀과 겨자씨를 빻기도 했다는 풍차, 이 나라의 오랜 역사가 느껴졌다.  정미소 같은 분위기의 풍차내부를 구경하고, 치즈를 만드는 집을 들러 한 조각 맛을 보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광을 가슴에 담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작아져가는 풍차를 보니 미술관에서 본 고흐의 그림 ‘바람 이는 풍차’가 클로즈업되었다.    

  썬 그라스를 끼고 막내딸은 운전을 한다.  나를 태우고 내비게이션 안내를 받으며 네덜란드 땅을 거침없이 달린다. 잦은 외국 출장에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는 당부는 했지만, 언어도 길도 이토록 능통할 줄이야.

  “우리 막내, 참 멋지다”

  “엄마, 이제야 아셨어요.” 우리 모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오늘은 회사업무로 알게 된 얀씨집에 점심초대를 받아가는 길이다.    아침에는 비가오더니 금세 뭉게구름이 하늘 끝자락에 걸려있다. 시원하게 뻗은 외각도로를 한 시간 남짓 달렸다.  숲이 우거진 길을 뚫고 도착한 곳은 ‘린드’라는 마을이다.  푸른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있고 아담한 이층집 앞에 얀씨부부가 나와 있었다.  시원한 눈을 보아도 서구적 매력이 넘치는 부인, 중소기업 사장님이라는데, 얀씨는 키도 크고 체격도 컸다.  딸의 말대로 인상이 넉넉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나를 보자마자 덥석 안는다. 순간 나는 당황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곳은 사람들은 안고 뺨에 키스까지 하는 것이 인사법이란다.  보라색수국이 핀 꽃밭을 지나 거실로 안내되었다.  오십대 중반인 부부는 자녀 둘을 키워 독립을 시키고 호젓하게 살고 있었다.  두툼한 책을 내놓으며 자기네 집 역사라고 했다.  책장을 넘기자 아이의 탄생부터 오늘이 있기까지의 세월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흙장난하다가 잠든 모습, 상패를 받는 사진과 졸업사진, 인상적인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지을 때, 꼬마들이 첫 삽을 뜨는 장면이다.  가족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점심이 끝나고 나는 녹차를 마시며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딸은 옆에서 통역을 한다.

  “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입니다. 그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요.” 그리고 그는 웃는다.

  부인을 끔찍이도 아끼는 분이라는 이야기는 딸을 통해들었다.  요리를 못하는 아내를 위해 식사준비는 주로 얀씨가 한다는 것, 아침잠이 많은 아내와는 남남이 되었다가 퇴근 후에 만난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바라보는 눈길, 이들에게서 오는 느낌은 신뢰와 사랑이었다. 마치 나는 너를 위해 살고, 너는 나를 위해 사는 그런 삶, 내 마음까지 행복해졌다.

   암스테르담에 오면 꼭 운하 크루즈를 하라는 얀씨의 권유에 해질 무렵 우리는 유람선을 탔다.  불이 켜진 암스테르담의 밤풍경은 환성이 나올 정도로 로맨틱했다.  꽃이 가득한 노천카페에서 한잔하며 유쾌하게 웃는 사람들, 허리를 감싸 안고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들,  강을 따라 한 시간 여 야경을 감상했다.  배를 탄 사람들은 삼십 여명,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다.  머리를 뒤로 넘긴 말쑥한 청년들은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칸초네 ‘싼타루치아’를 멋지게 불렀다. 우리 모두는 손뼉을 쳤고 ‘부라보’를 외쳤다.  낭만이 흐르는 선상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며칠간의 여행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헤이그에 있는 ‘마드로담’ 이다. 이곳은 암스테르담의 명소를 소인국처럼 축소해 놓은 곳인데, 댐을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했다는 소년 ‘한스’의 모형이 입구에 있어 초등 때 읽었던 기억이 났다. 네덜란드 하면 떠오르는 꽃 튤립은, 축제가 끝난 뒤여서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지만 , 안네 프랑크의 집, 음양의 마술사 렘브란트, 풍속화를 그림 베르메르의 그림을 국립박물관과 미술관 에서 만날 수 있는 안복을 누렸다. 

   2002년, 우리나라 축구를 빛내주었던 히딩크의 고향 네덜란드, 자유와 관용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 그들은 유머가 있고 친절했다. 낭만이 흐르는 암스테르담, 나는 오래도록 이 도시를 잊지 못할 것 같다.                        


                                    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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