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2.01.20 햇볕 가득한 오후 by 물오리
  2. 2011.03.05 딸이 더 좋아 by 물오리
  3. 2011.03.05 딸과 무대 by 물오리
  4. 2011.03.05 낭만의 도시 암스테르담 by 물오리
  5. 2011.03.05 독감을 몰고 간 그날의 감격(感激) by 물오리
  6. 2011.03.05 녹차 밭가는 길 by 물오리
  7. 2011.03.05 녹음(錄音) 연습-- -충북수필- by 물오리
  8. 2011.03.04 냉이와 씀바귀 by 물오리
  9. 2011.03.04 내가만난 클래식 by 물오리
  10. 2011.03.01 어머니, 나의 어머니 by 물오리 2


 

 

오전 열 시가 되면, 거실에는 햇볕이 가득하다.
그 해님은 돌아서 오후 두 시쯤, 내 방으로 찾아온다. 살구색 커튼을 통해 들어온 햇볕은, 마치 무대 조명등을 켜 놓은 듯 방안이 환하다. 문갑 위에 춘란(春蘭)은 봄을 기다리고 있는데, 햇볕을 받아 난 잎은 푸름으로 더욱 반짝인다. 나는 이럴 때,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차 한 잔을 마신다. 지리산자락에서 보내온 감잎차를 마시며, 그리운 벗들의 얼굴을 그려본다. 동지섣달, 이 깊은 겨울에 내가 누리는 호사다.

요즘 햇볕을 마주하면 새삼스레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 딸 덕분에 이곳 남향집으로 이사를 온 지, 일 년이 막 지났다. 아파트 뒤로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고, 앞으로 조금 나가면 내(川)가 흐르는 안양천이다. 꽤나 많은 세월을 살았는데, 지금처럼 남향집에서 살아보긴 처음이다. 젊은 날은 일하느라 바빴고, 추운 기운이 들어온다는 북향집만 피했지, 집값이 더 나가는 남향집을 택하기에는 부담도 되었고, 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예로부터‘남향집에 살려면 3대가 적선을 해야 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곳에 살면서 사계절을 맞고 보니 왜 그런 말이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하다. 그래서 남향집을 길(吉) 한집으로 꼽았나 보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면, 화가 오지호(1905- 1982)의 대표작인‘남향집’이 전시 되어있다. 조선의 빛을 처음으로 화풍에 담았다는 이 그림은, 언제 보아도 정감이 넘친다. 햇볕이 쏟아지는 오후, 빨간 원피스를 입고 대문을 나서는 단발머리 소녀와 담벼락 아래 낮잠을 즐기는 흰둥이, 보고 있으면 내 유년의 고향이 떠오른다. 그 담벼락 앞에 옹기종기 앉아 소꿉놀이했고, 공기놀이했던 어린동무들이 보인다.

‘남향집’은 1935년, 개성에 있는 ‘송도 보통학교’ 미술교사로 있을 때, 화가 오지호가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대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아이는 둘째 딸이라고 했다. 이 그림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2년 벽두에 무료전시회를 하고 있는데, 그의 유족이 미술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지구의 건강상태가 예전 같지 않아, 대체로 일사(日射)량이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난여름은 많은 비가 내려서 피해도 컸지만, 볕을 보기가 정말 어려웠다. 햇볕의 고마움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을까만, 나는 이 겨울 무량으로 쏟아지는 볕이 마냥 고맙기만 하다. 어느 문학지에‘햇볕이 소중해 한여름에도 양산을 쓰지 않는다.’는, 노(老) 작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문구를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나이가 들면 소중한 것이 많아지는가 보다 이 겨울 , 찾아온 햇볕에 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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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더 좋아

수필[Essay] 2011. 3. 5. 03:31
 

 

  2010년, 우리 사회가 딸을 더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고 속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딸만 셋을 키운 내 젊은 시절이 떠올라서다. 어디 나뿐이랴, 딸만 둔 여인들은 나처럼 미소를 짓지 않을까 싶다. 

  결혼을 하고 첫 딸을 낳았을 때, 시어머님은 살림밑천이라고 좋아하셨다. 그리고 두세 살 터울로 둘째, 셋째가 태어났을 때도, 그 시절 인기가 많았던 가수 그룹을 운운하시며 ‘안 시스터즈를 만들면 되겠네.’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의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여 딸만 낳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지 살피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시누이든, 손위 동서든, 누구든지 한마디만 하면 바로 대항할 자세로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이 사람이 누가 뭐란다고 그래, 마음 편히 갖고 우리 딸들 잘 기르자 구.”

  좌불안석인 나에게 남편이 해준 말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때 경험했다.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웃음만 나온다.

나의 시어머님은 보기 드문 호인(好人)이셨다. 시댁과의 갈등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어머님 덕분에 마음고생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늘 인자하셨고 품성이 어진 분이었다.  맛나게 미역국을 끓여주셨던 일, 생명의 소중함을 일러주시며 언짢아하는 내 마음을 토닥여 주셨던 일, 세상 떠나신지 십여 년이 넘었지만 생각하면 그리운 마음뿐이다.

 

  우리나라 남아선호사상은 그 뿌리가 깊다. 고려시대 이후에 확립되기 시작하여 유교문화의 융성과 1700년 중엽 이후, 철저하게 계승되었고, 가계계승을 위한 전통가족제도가 원리였다. 장자는 결혼하여 부모와 함께 살면서 봉 제사(奉祭祀)를 받들고, 가족제도가 부계(父系)로 이어지면서 남아 선호사상은 더욱 굳혀졌다. 1970년 영화로 상영되었던 ‘이조여인잔혹사’는 작고한 신상옥 감독의 작품이다. 봉건적인 인습에 희생된 조선시대여인들의 이야기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이란 악습으로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들이 받는 수모와 핍박은 처절할 만큼 잔혹했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한일인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이 땅의 여인들은 아들을 원했다. 나 역시 남편을 닮은 아들 하나 얻기를 소원했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막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사주(四柱)를 잘 본다는 철학관을 찾아갔다. 아들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다. 허탈해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딸도 잘 키우면 아들 노릇 합니다.’ 했다.  

  1980년대, 아들을 둔 사람은 그야말로 든든한 노후보험이라도 들어 놓은 것처럼 흐뭇해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들 밥은 편히 앉아서 받아먹고, 딸 밥은 서서 먹는다.’라는 말도 있었다. 

어느 모임을 가든, 또 조금 안면(顔面)을 트고 나면 사람들은 물었다.

“ 몇 남매 두셨어요?”

“딸만 두었습니다.”라고 답하면 혀를 끌끌 차거나 동정어린 눈으로 나를 보곤 했다.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남매를 두었어요.’ 하는 말로 대신해버린 적도 있었다. 그간에 딸들을 키우며 어쩔 수 없이 웃어넘긴 일은 부지기수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잘했다는 상도 받아오고 칭찬도 듣고, 여느 집처럼 자식 키우는 재미에 나는 서운함을 잊어갔다. 사춘기가 지나고 딸들이 예쁜 숙녀로 자랐을 때, 우리 집은 달라지는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화병에 꽃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것은 딸들의 남자친구가 주는 꽃이었다. 빨간 장미로 시작하여 핑크빛 튤립, 노란 후리지야, 하얀 안개꽃, 향기나는 백합까지, 시들만 하면 번갈아 들고 들어 왔다. 꽃만 피는 것이 아니라, 딸아이들도 곱게 피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흐뭇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딸아이들과는 마음이 잘 통했다. 친구도 이런 친구가 없다. 쇼핑도 함께하고, 여행도 함께 간다. 그것은 딸을 둔 엄마들만의 특별한 혜택이지 싶다.

  요즘은 시집간 딸 곁에 사는 것이 편하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한다. 김치를 담아 택배로 보내고, 며느리에게 전화만 해야 하는 시대라고 친구들은 말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아들은 품 안의 사랑이고, 딸은 영원한 사랑이란다. 농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세태를 잘 반영하는 것 같다. 

 

  시인 이향지씨는 ‘반달’을 작사 작곡한 윤극영 선생님의 며느리다. 생전에 며느리들로부터 아버님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아버님을 ‘아버지’로 불렀고, 그 선생님도 당신의 아들과 딸처럼, 며느리를 쉰이 되도록 이름 ‘향지’로 불렀단다.  불필요한 격식을 걷어버림으로 더욱 가까워진다는 이 시인은, 그 아버지를 사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 딸이 결혼하면 그 집 며느리요, 아들이 결혼하면 내 집 며느리다.  딸, 아들, 며느리, 차별 없이 이름을 부른 것은, 그 선생님만의 특별한 사랑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안이 환했던 딸들은 혼인을 했다. 가까이 살아 손자 손녀 안겨주고 오순도순 산다. 내목소리만 들어도 컨디션 지수(指數)를 짐작하는 둘째 딸, 시시때때로 어미생각을 해주는 딸아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온 것이라 읊은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 모두 그 소풍 끝나면 떠나는 인생일 것인데,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떠하랴, 주님이 나에게 주신 소중한 생명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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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무대

수필[Essay] 2011. 3. 5. 03:28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여기 오페라 하우스예요. 지금 출발하세요.”

“그래, 알았다.” 나는 서둘러 서초동에 있는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신년 뮤지컬, 바리- 잊혀진 자장가.’라고 쓰인 현수막이 극장외벽에 걸려있다. 나는 딸의 안내로 객석에 앉았다.  조각과를 나와 무대미술2년 과정을 마치고 제작팀과 함께 한 작품 ‘바리데기’ 공연이다.

  “ 무대 장치를 잘 보세요.  특히 2부에서는 볼거리가 많아요.”

   팜플랫 속에 조그맣게 나와 있는 딸에 이름을 발견하고 나는 코끝이 찡해왔다. 극장을 울리는 음악과 함께 웅장한 무대가 열렸다. 커다란 고분을 연상케 하는 왕궁이다. 녹슨 청동거울은 미로를 상징하는 것으로 조상과 만나는 통로란다. 바리공주는 전래의 바리데기, 아버지 오구왕이  병이 들자 생명수가 있다는 저승을 찾아 천신만고 끝에 신령의 물을 얻어 아버지를 살리는 줄거리다. 바리는 착한 마음과 아버지를 구한 효성심으로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 일면 ‘오구풀이’ 로도 부리며 전국으로 전승되는 사설 무가이다.  오늘의 어려운 현실과 접목하여 버려진 자가 구원하는 희망의 세상, 신년벽두에 주인공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계기로 삼고 싶어 만들었다는 당장의 해설이다.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하나 둘 등장한다. 화려한 조명과 감미로운 음향, 이야기가 전개될 때마다 큰 무대가 아래로 사라졌다가 다시 올라오고 빙그르르 돌면서 상황이 바뀐다. 기울어가는 왕궁과 폐허의 도시는 암울한 회색과 진 밤색으로 표현하였다. 2막에 쏟아지는 폭포아래 방망이질을 하는 바리공주, 그 장면은 마치 떨어지는 물방울이 곧바로 튀어 오를 듯 리얼하다. 생명수가 있는 서천 땅, 이슬을 머금은 숲 속에는 영롱한 옥 바위가 서있고 삼천년 만에 열려서 득도한 사람만 먹는다는 천도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무대는 참으로 웅장했다. 바위 길이가 9m 가 넘어서 작업이 어려웠다고 하더니 왕궁이며 암벽을 어찌 만들었는지, 생각했던 것 보다 어려운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막이 오를 무렵, 감기가 들더니 계속 기침을 하며 다닌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찰흙으로 만들기 과제였다. 연꽃 잎 위에 청개구리가 앉아 있었다. 물감으로 색칠까지 하여 모양새가 어찌나 정교하던지 우리 내외는 놀라고 있었다.

  “ 우리 딸 재주가 있구나.” 아빠의 말이다.

순한 줄만 알았던 그 꼬마가 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부터였다. 관심이 있는 놀이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조르기 시작하면 해결될 때까지 고집을 부렸다. 회초리를 들기도 여러 번이었다. 도망이라도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조그만 입을 꼭 다물고 피하지를 않아 끝내 엄마를 울렸던 아이, 그러나 자라면서 그 고집은  심심치 않게 상장과 상패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대학 입시를  앞에  놓고 교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끝내 조각과를 지망했고 나는 또 딸아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조각전에서 입상을 한 것도 그 무렵이다. 한참 예쁘게 꾸밀 나이에 옷차림은 물감 칠에 왁스, 언제나 먼지투성이다. 여자아이가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분야를 스스로 구축해 가기엔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무대 미술 2년 과정을 자기 힘으로 해결했으니 공부하랴 일하랴 미처 씻지도 못하고 곯아 떨어졌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자식도 키워보면 제각기다. 재능도 있고 하고자하는 열의도 확고한 아이를 시원하게 밀어주지 못하는 것이 나는 늘 미안했다. 그러나 묵묵히 자기 길을 가고 있었다. 그것은 과묵한 아빠의 성격을 닮은 것 같았다.  바리 작품 끝내고 소극장 무대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삼월에 막을 올린단다. 이제 무대 미술 책임자로 첫출발이다.  높은 콧대만큼 주장도 신념도 확실해 잘 해내리라 믿는다.

  “경제적으로 밀어주지 못해 미안 하구나.”

  “엄마, 환경이 좋았다면 열심히 안했을지도 몰라요.”

   하긴 너희들이 없었다면 난들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이번 공연에 거의 한달을 매달리고 곤하게 잠이 들었다.  손을 만져보니 굳은 살 투 성이다. 꼬마 때 그 솜씨가 무대를 꾸밀 줄이야, 미술과 무대를 총괄하는 종합 예술가, 그리고 더 큰 세계로 나가 공부하는 꿈을 키운다. ‘ 네 꿈을 이루어 내리라 엄마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큰 딸 힘 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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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의 도시 암스테르담  -한국수필 발표-


  

   나는 지금 네덜란드 운하(運河)의 도시 암스테르담에 와있다.

   5월 중순, 아침햇살에 깨어나는 도시를 본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는 암스테르담은 안개에 쌓여 신비스럽도록 아름답다.  반짝이는 물, 동화 속에 나올듯한 예쁜 집들이 강을 따라 마주하고 서 있다.  아치형다리가 그림처럼 놓여있고, 그 아래 조그만 나룻배들은 물길을 따라 묶여있다.  파란 하늘, 두 팔을 벌린 듯이 서 있는 나무와 강가에 펼쳐진 녹음, 그런가하면 창문마다 피어있는 꽃들, 그림에서만 보았던 이 청한(淸閑)한 풍경에 나는 잠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작곡을 했다는 ‘비발디의 사계’ 봄, 1악장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회사일로 출장을 가는 막내를 따라 오게 된 며칠간의 네덜란드여행이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있는 ‘에스텔지아’ 호텔, 이 강가에 여정을 푼 것은 딸의 배려였다.  로비에서 도시의 생김을 소개하는 지도를 받아들고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지형은 우리나라 쥘부채 모양과 비슷한데,  거미줄처럼 돌아가며 촘촘히 그려진 것이 모두 물길이란다.  과연 물의 나라였다.  

   13세기 초, 암스텔강 하구에 댐을 만들어 조성된 도시라하여 암스테르담,  165개의 운하가 흐르고 1000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단다. 암스테르담과 라인강 하류인 레크강을 연결하는 길이는 80km인데 가장 큰 뱃길이라고 했다.  네덜란드는 해수면 보다 25프로가 낮은 땅이라고 한다. 그래서 국명도 원어로 ‘낮은 땅’이다.     

  1953년 겨울, 폭풍과 함께 몰아닥친 파도는 해안지역을 덮어 제방은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과 가축, 농지가 사라졌단다.  이를 계기로 댐, 제방, 수문, 운하, 건설 등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들은 세계최고의 수리공학(水利工學) 기술을 바탕으로 한 ‘델타프로젝트’(Delta Project)를 운영하여 오늘날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높은 파도로부터 사람을 지키기 위해 델타지역에 7개의 댐과 방조제가 건설되었고, 현재 물 관리에 많은 돈을 들여 홍수와 생태계를 회복하는데 쓴다고 한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바다보다 낮은 땅을 어떻게 이토록 멋진 도시로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도시 안에는 60개 이상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어 다양한 문화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안내서와 설명하는 글을 딸은 꼼꼼히 읽어 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유난히 키가 컸다. 그래서 그들은 성큼성큼 걷는다.  경쾌해 보이고 활동적으로 보인다. 저마다의 개성 있는 패션은 멋이 흐르고, 낯선 이방인에게도 눈만 맞으면 웃는다.  ‘트램’이라는 전철이 도시 한복판을 누비고 택시가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간다.  급한 것이 없다.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데, 도시 전체에 전용도로가 따로 있다고 한다.  인형처럼 생긴 금발의 아가씨는 연인과 나란히 손을 잡고 자전거를 탄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나이에 상관없이 어깨를 걸거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는다.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에서, 처음 보게 된 그림에 잠시 빠져있기도 했지만, 머리가 하얀 노부부들이 어깨를 감싸고 진지하게 감상하는 모습에 나는 더 눈길이 갔다. 

  네덜란드 여객기 (KLM)를 탑승하면서 내 머리 속에 그려진 것은 풍차였다.  이곳에서 13km 떨어진 ‘잔세스칸스’, 풍차마을로 딸과 나는 출발했다.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풍경을 간직한 곳이라 하더니, 호수와 목조건물이 눈앞으로 다가선다.  아름답다는 표현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카메라를 들고 아무 곳이나 촬영을 해도 그림이 된다. 드디어 ‘잔 강’이 흐르는 기슭에 위용을 자랑하듯 풍차가 서있다.  가까이 보니 날개도 높이도 엄청나다.  때마침 풍차 두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바람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위풍당당하다.  저지대의 물을 퍼 올리기도 하고 호밀과 겨자씨를 빻기도 했다는 풍차, 이 나라의 오랜 역사가 느껴졌다.  정미소 같은 분위기의 풍차내부를 구경하고, 치즈를 만드는 집을 들러 한 조각 맛을 보았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광을 가슴에 담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작아져가는 풍차를 보니 미술관에서 본 고흐의 그림 ‘바람 이는 풍차’가 클로즈업되었다.    

  썬 그라스를 끼고 막내딸은 운전을 한다.  나를 태우고 내비게이션 안내를 받으며 네덜란드 땅을 거침없이 달린다. 잦은 외국 출장에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는 당부는 했지만, 언어도 길도 이토록 능통할 줄이야.

  “우리 막내, 참 멋지다”

  “엄마, 이제야 아셨어요.” 우리 모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오늘은 회사업무로 알게 된 얀씨집에 점심초대를 받아가는 길이다.    아침에는 비가오더니 금세 뭉게구름이 하늘 끝자락에 걸려있다. 시원하게 뻗은 외각도로를 한 시간 남짓 달렸다.  숲이 우거진 길을 뚫고 도착한 곳은 ‘린드’라는 마을이다.  푸른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있고 아담한 이층집 앞에 얀씨부부가 나와 있었다.  시원한 눈을 보아도 서구적 매력이 넘치는 부인, 중소기업 사장님이라는데, 얀씨는 키도 크고 체격도 컸다.  딸의 말대로 인상이 넉넉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나를 보자마자 덥석 안는다. 순간 나는 당황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곳은 사람들은 안고 뺨에 키스까지 하는 것이 인사법이란다.  보라색수국이 핀 꽃밭을 지나 거실로 안내되었다.  오십대 중반인 부부는 자녀 둘을 키워 독립을 시키고 호젓하게 살고 있었다.  두툼한 책을 내놓으며 자기네 집 역사라고 했다.  책장을 넘기자 아이의 탄생부터 오늘이 있기까지의 세월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흙장난하다가 잠든 모습, 상패를 받는 사진과 졸업사진, 인상적인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지을 때, 꼬마들이 첫 삽을 뜨는 장면이다.  가족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점심이 끝나고 나는 녹차를 마시며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딸은 옆에서 통역을 한다.

  “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입니다. 그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요.” 그리고 그는 웃는다.

  부인을 끔찍이도 아끼는 분이라는 이야기는 딸을 통해들었다.  요리를 못하는 아내를 위해 식사준비는 주로 얀씨가 한다는 것, 아침잠이 많은 아내와는 남남이 되었다가 퇴근 후에 만난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바라보는 눈길, 이들에게서 오는 느낌은 신뢰와 사랑이었다. 마치 나는 너를 위해 살고, 너는 나를 위해 사는 그런 삶, 내 마음까지 행복해졌다.

   암스테르담에 오면 꼭 운하 크루즈를 하라는 얀씨의 권유에 해질 무렵 우리는 유람선을 탔다.  불이 켜진 암스테르담의 밤풍경은 환성이 나올 정도로 로맨틱했다.  꽃이 가득한 노천카페에서 한잔하며 유쾌하게 웃는 사람들, 허리를 감싸 안고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들,  강을 따라 한 시간 여 야경을 감상했다.  배를 탄 사람들은 삼십 여명,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다.  머리를 뒤로 넘긴 말쑥한 청년들은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칸초네 ‘싼타루치아’를 멋지게 불렀다. 우리 모두는 손뼉을 쳤고 ‘부라보’를 외쳤다.  낭만이 흐르는 선상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며칠간의 여행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헤이그에 있는 ‘마드로담’ 이다. 이곳은 암스테르담의 명소를 소인국처럼 축소해 놓은 곳인데, 댐을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했다는 소년 ‘한스’의 모형이 입구에 있어 초등 때 읽었던 기억이 났다. 네덜란드 하면 떠오르는 꽃 튤립은, 축제가 끝난 뒤여서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지만 , 안네 프랑크의 집, 음양의 마술사 렘브란트, 풍속화를 그림 베르메르의 그림을 국립박물관과 미술관 에서 만날 수 있는 안복을 누렸다. 

   2002년, 우리나라 축구를 빛내주었던 히딩크의 고향 네덜란드, 자유와 관용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 그들은 유머가 있고 친절했다. 낭만이 흐르는 암스테르담, 나는 오래도록 이 도시를 잊지 못할 것 같다.                        


                                    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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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기가 달포나 끈질기게 나를 잡았다.

   콩 만 한 편도선이 부어 침을 삼키기도 어렵고 기후 탓이라는데, 신종 바이러스가 체질 따라 침투해 나갈 줄을 몰랐다. 코 막힘과 띵한 머리 하루거리처럼 해질녘은 더했다. 심해지는 공해 때문이겠지만 ‘오뉴월 감기는 뭐도......’ 하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하지는 않았는데, 큰 병이라도 생긴 것 같아 우울했다. 약을 먹고 어 한기가 들어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쿠션을 기댄 채 누웠다.

   2002년 월드컵, 드디어 막이 올랐다.

   6월4일, 폴란드와의 첫 경기를 보기 위해 큰아이, 둘째, 그리고 사위까지 우리 가족은 이른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았다.

   백일 남았다, 한 달 남았다, 매스컴에서 이야기 할 때마다 세계의 눈이 집중되는 나라 잔치이니 잘 치러 내야할 텐데 하는 염려의 마음이 앞섰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축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열 한 명이 뛰는 것과 볼을 발로 차서 골대 안에 넣으면 한 점을 득점한다는 것 그 정도다. 중계방송에서 ‘골-인’ 하면 그냥 ‘공이 들어갔구나.’ 했다.  노년을 심심하지 않게 보내려면 각종 경기에 취미를 가져야한다는데, 운동 신경이 둔한 편이라 그런지 좀처럼 마음이 가질 않는다.  하긴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가 군대 이야기와 축구 이야기라고 했다지 않은가.  약 기운 때문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와-” 하는 함성이 귓전을 때렸다. 

   “골인, 골인, 어머니 골인입니다” 사위도 딸도 박수를 치며 소리소리 지른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도 난리다. 아파트 전체가 들썩들썩 할 것 같은 함성이다. 첫 꼴을 넣고 달려 나오는 황선홍,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이 거듭 클로즈업된다. 전반전 26분의 선제 골, 나도 가슴이 요동을 친다. 그리고 후반전 유상철의 두 번째 골, 아- 놀라운 첫 승리였다.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의 5만여 관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48년만의 쾌거라고 해설자도 신명이 났다.  광화문, 세종로 네거리, 대학로, 수천 명씩 모인 붉은 악마-  나라 안은 그야말로 감격(感激)의 물결이다.

 

   공격수가 있고 상황에 따라 뛰는 미드필더, 수비와 골키퍼, 그리고 반칙으로 발생되는 옐로카드와 퇴장을 당하는 레드카드, 코너킥과 프리킥, 상대팀에게 쉽게 득점을 내줄 수 있는 페널티 킥, 경기를 보며 배우니 한결 재미가 더 하다. 

   볼이 바나나처럼 휘어서 들어가는 것은 바나나킥, 몸을 공중으로 날려 머리위로 차는 것은 오버헤드킥, 이 슈팅은 멋지고도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태극전사들의 승승장구(乘勝長驅)와 함께 감동은 이어졌다.

   6월 15일, 참가국들의 경기 속에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선수가 있었다. 전차군단으로 불리는 독일 팀의 골키퍼 ‘올리버 칸’이다. 나는 이 선수를 보는 순간 언 뜻 고릴라가 떠올랐다.  눈과 눈썹 사이가 좁고 잇몸은 조금 튀어 나왔으며 가느다란 눈에서는 광채가 났다.  어느 쪽에서 날아오든 간에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는다.  신문에서는 그를 거미손이라고 했다.

   21일 준준결승 날 미국과의 경기에서 칸은 왼쪽 깊숙이 들어간 결정적인 슛을 모서리까지 나와 잡아냈다.  미국의 공세를 철벽(鐵壁)의 수비로 방어한 것이다. 공격수가 힘차게 슛을 하면 거미 손은 어김없이 잡고 만다.  스피드와 순발력, 결코 놓치지 않는 동물 적인 감각에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인간이 저토록 빠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거미 손 이운재- 22일 4강을 눈앞에 두고 연장전까지 몰고 간 스페인과의 120분, 이기고 지는 것이 결정되는 승부차기의 아슬아슬한 순간, 모든 것은 골키퍼 이운재의 손에 달려 있었다. 숨을 죽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양손을 감싸 쥐었다. 드디어 네 번째 키커- 호아킨이 슈팅한 공을 그는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동작으로 막아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아이를 얼싸안고 겅중겅중 뛰었다.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다. 이 통쾌함 속에 슬금슬금 찾아왔던 한기(寒氣)도 꼬리를 감추고 태극전사 이운재 얼굴만이 흐려진 시야 속에 들어왔다.  그는 4강 신화에 주역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 공놀이는 직사각을 그려놓고 했다. 양쪽 라인밖에는 공격수가 있고 안에는 상대팀이다. 한 사람 한사람 공으로 공격을 하는데 맞으면 탈락이다.  공을 받다가 놓쳐도 퇴장이다. 그 대신 날아오는 공을 잘 받으면 실격되었던 친구가 다시 살아 합류한다.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매번 공을 놓치고 만다. 마음으로는 다른 아이처럼 잽싸게 받아 우리 편 하나라도 살리고 싶었지만 피하는 것도 못해 눈총을 받았으니 게임에서 인기가 없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어쩌다 공을 두 손으로 받아 가슴에 안으면 그 성취감은 대단했다. 날아오는 공을 받는 것, 그것의 묘미를 나는 그때 터득했다.

   예측할 수 없는 공을 척척 받아내는 거미 손, 넘어지면서 막아내고 몸을 날리면서 낚아채는 모습은 너무도 놀랍다. 그들은 역시 아름다운 프로였다.

  모든 경기를 끝내고 칸의 웃는 얼굴은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칸과 이운재, 이들의 거미손은 4강이란 영광의 고지 위에 조국을 나란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피파가 골키퍼에게 주는 최고의 상 ‘야신상’ 후보에도 함께 올랐다.

  한 달 여의 감동 속에 독감은 사라지고 나는 이제 축구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졌다. 이 시대를 살아서 극도에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오늘을 위해 우리 가족은 축배를 들었다.               

                                                      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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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 코가 닮았네요. 따님 코가 조금 더 높네요."

여대생인 듯, 처녀들은 딸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며 웃는다. 동그란 얼굴 외에는 꼭 집어 닮은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코가 닮았단다. 일행의 사진을 서로 찍어주고 능선을 향해 오른다.

   이곳은 전라남도 보성, 해발 350M고지의 오선봉 녹차 밭이다. 산마다 큰골이 지어 있고, 능선을 따라 가지런히 자란 녹차 밭은 꿈속인 듯 새벽안개에 쌓여있다. 근간에 채취했는지, 웃자란 여린 잎이 나를 보고 웃는다.

  "엄마, 이쪽에 서 보세요. 안개와 능선, 구도가 멋있게 잡혀요."

  나는 어색하지만 포즈를 취해 보았다. 옆으로 비켜서 한방, 어린애처럼 골 사이에 앉아서 한방, 이 청초한 새벽 풍경을 하나라도 더 담고 싶어 찍고 또 찍는다.


  팔월 초 신문에 '자- 떠나자' 란 타이틀로 전면을 채운 녹차 밭, 그 문구는 나를 유혹했다. 보고 싶었다. 지면을 통해서, TV광고를 볼 때마다 신선한 정경이 삼삼했다. 큰딸이 저녁을 먹으며 마침 며칠 시간이 있다고 했다. 지도를 펴놓고 길을 찾아 표시를 하고 운전은 번갈아 하며 가자고 결론을 냈다.

  간단한 준비와 함께 동이 틀 무렵, 우리 모녀는 1000리 길 장정에 올랐다. 내심 흔쾌히 뜻을 받아준 딸이 고맙고, 오붓한 둘만의 여행이 기뻤다.

  수원을 지나 경부 고속도로 - 회덕분기점,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장마는 소강상태이고, 파란 하늘은 면사포구름을 잔뜩 이고 있다. 장거리 운전에 피곤해하는 딸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주고 나는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호남으로 질주- 광주 도착한 것이 오후 4시, 전라도라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고속도로를 나와 화순에 이르니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오 메, 인자 왔오.' 초행인 나를 보고 던지는 말 같아 웃음이 나왔다. 능주를 지나 보성으로 가는 길은 빨갛게 핀 백일홍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안개가 걷힌다. 성하(盛夏)의 강렬한 햇빛에 녹차 밭이 모습을 드러낸다. 몇 만평이나 될까, 능선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남해의 해풍을 받고 있는 구릉지대, 다습한 기후에 잘자란 녹차 잎은 윤기가 흐른다. 칙벽 나무처럼 생긴 삼나무가 녹차 밭 사이로 우람하게 서있고, 모 광고를 찍었다는 푯말이 모퉁이 에 서 있다.

  " 멋진 풍경이네요. 오길 잘했어요. 엄마."

  " 그래, 딴 세계 같구나"

  단아하게 지어 놓은 정자에 다리를 펴고 누워본다. 산을 뒤덮는 은은한 향기, 어디론가 둥둥 떠가는 것만 같다. 그림을 전공한 딸은 시야에 잡히는 풍경을 스케치한다. 옆얼굴을 바라보니 오뚝한 코가 조각처럼 예쁘다. 언젠가 짝이 생기면 둘째처럼 내 곁을 떠나가겠지, 서둘러 가야함도 분명 한데 오늘의 내 마음은 마냥 행복하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옥과 보다 좋은 신선한 차 보내왔네.

맑은 향기는 한식 전에 따 그런 가

고운 빛깔은 숲 속 이슬을 품었네.

돌솥에 물 끓는 소리 솔바람 소리인양.

자기 잔에 도는 무늬 꽃망울을 토한다.'


고려 후기의 문신 이제현의 시다.


  시음장 벽에 걸린 시구를 읽어보고 우리는 나무로 만든 테이블에 앉았다.

  "삼분을 기다리시고, 세 번을 우려서 드세요. 녹차를 넣어서 구운 쿠키가 있습니다."

  나이는 삼십 후반쯤 되었을까, 다원에서 나온 아낙인데 고운 인상이다. 딸이 따라주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조금씩 음미하며 마신다. 코끝에 스미는 향이 감미롭기 그지없다.

  녹차는 7년이 되어야 채취를 하며, 시기는 곡우 전후에 딴 것을 세작(細雀)이라 하여 최상품으로 친단다. 입하 전후에 딴 것은 중작(中雀)이라 하고 발효 정도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눈다. 잎을 덖어서 엽록소를 그대로 보존시킨 녹차, 10 퍼센트 발효하면 청자, 50퍼센트를 발효하면 오룡차, 100퍼센트 발효한 것은 빛깔이 붉어서 홍차란다. 녹차에 맛은 쓰고, 떫고, 시고, 짜고, 단, 다섯 가지의 맛인데 이중에 가장 먼저 닿는 맛은 쓴맛이고 오래 입안에 남는 맛은 단맛이다. 위로는 머리를 맑게 하고 아래로는 소화를 돕는다고 자세히 설명한다.

    다도는 도(道)와 통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며 예(禮)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오늘은 쉽게 이해가 된다. 차하면 우선 커피가 떠오르고 나도 커피를 즐긴다. 그러나 이제 생각이 바뀐다.  공기 맑은 산하에서 이슬을 먹고 자란 여린 잎들, 거듭 덖어서 손이 가길 수차례, 정성만큼 향도 깊어 세 번을 우려먹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물을 붓고 여유 자작하게 기다리는 침착성, 차석에서 나누는 정담이야말로 현대인들의 심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지 않을까, 오늘에 이 정경(情景)을 가득 담아 작은 차상 하나를 마련하리라.

-이 땅에 나고 자란 은혜를 생각 한다-  이호신님의 기행문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라는 기행문의 머리글이 생각난다. 나 역시, 아름다운 국토에 태여 남을 감사한다.

  "엄마, 우리강산 참 아름답다. 자주 다녀야겠어요."

나는 미소로 답하며 딸 손을 잡고 삼나무 숲을 나왔다. 찌는 듯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마음은 초록으로 물들어 우리는 귀경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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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평 남짓한 녹음실은 밝고 깨끗했다.

책상위에는 녹음기가 놓여있고 의자에 앉으니 편안하다. 헤드폰을 귀에 걸고 마이크를 조절했다. 나는 오늘 책읽기 음성 테스트를 받으러 왔다.  이곳은 경기도 부천에 있는 점자 도서관이다. 건물 안에는 다섯 개의 녹음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지난 초여름부터 벼르다가 아침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얼굴이 동그랗고 안경을 낀 집사님은 기기 사용법과 녹음 할 때의 유의 사항을 꼼꼼하게 설명해주었다.

  유리벽 너머에서 ‘큐’ 사인이 떨어지자 은은한 시그널 음악이 흐른다. 나는 되도록 부드럽게 천천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사단법인 사랑 선교회는 장애인 단체로서 장애인 복지 사업을 목적으로 1985년 설립되었고 각종 장애인 재활교육과 복지 사업을 통하여 장애인들이 정상적으로 사회화 할 수 있도록 돕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이곳 소개를 한다. 그리고 도서명과 지은이를 소개하고 끝으로 읽는 사람을 밝힌 다음 책읽기를 시작한다.  종교서적부터 시, 수필, 소설, 책은 낭독하는 사람이 선택을 한다. 나는 류시화님의 수필집 ‘ 하는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한편을 골랐다. 막상 헤드폰을 타고 들리는 목소리는 다른 삶의 음성처럼 낯설었다. 집에서 소리 내어 여러 번 읽어 보았는데도 숨쉬기 조절이 어렵고  된 발음에서 더듬거렸다. 무엇보다 ‘노 프라블럼’ 이란 외국어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녹음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책장을 넘길 때는 잡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목이 잠겨오면 잠시 쉰다. 간신히 한편을 읽고 나니 긴장해서 그런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어 발음이 엉망이고 리을

발음이 분명치 않았다.

  녹음결과는 목소리는 괜찮은데 속도가 느리고 너무 낮은 음성이라고 했다. 책을 읽을 때의 목소리는 도레미의 레와 미 중간 음이 좋고, 처진 음성은 듣는 이의 마음까지 처지게 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입을 크게 벌려 발음을 정확하게 해주어야 하고 자기 목소리 높이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삼켜졌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연습을 하다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낭독한 책을 듣고 감동이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 보람을 느끼고 말이야,” 이곳에 살면서 여러 해 봉사를 하고 있는 친구

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다른 사람을 위해 조그만 일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 나이 오십을 넘으면 먼 산을 보는 나이’ 라고 한 임어당의 글이 떠오르며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특별하게 잘하는 일도 내세울 것도 없는데, 내 삶 속에는 고맙고 감사한 일이 많았다. 뭔가 작은 일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따듯해 왔다.  그러나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한동안 고심을 했다. 그때 장애인을 위해 녹음 봉사를 한다는 이 친구가 생각났다. 

  맹인을 위한 녹음, 그것도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된다했으니 그간 감동으로 읽은 책을 모두 읽어 주리라 했는데, 소리 내어 읽는 일이 뜻밖에 어려웠다. 

  

   삼십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아이들 선생님과의 면담이 있던 날인데, 내목소리가 방송인이 되었어도 좋았을 거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어쩌다 음성이 듣기 좋다는 말도 한번씩 듣기는 했다. 그렇다고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직업에 오래 종사하다보니 아무래도 음성이 트였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일로 조금은 자신감을 갖고 도전한 것인데, 서너 시간 여 연습을 했더니 목이 잠긴다. 삼사 개월은 연습기간이 소요되리라, 차 한 잔을 마시고 일어 설 때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녁 9시, TV 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유연한 음성이 들린다.  정확한 발음과 음정, 전문직이라고는 하지만 어쩜 저리도 잘 할까. 나는 비로소 감탄을 했다.

  “속도가 느려도 엄마는 해 낼 수 있을 거예요.” 

  막내의 응원이 고맙다.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차분히 연습하면 할 수 있겠지, 나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성껏 읽는다.  후일 누군가 들어줄 그 사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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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허리와 기슭을 뒤덮고, 붉게 물들인 진달래의 만발한 무리를 보지 않고 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우송(友松) 김태길선생님은 ‘아름다운 세상’이란 글에 만발한 진달래꽃을 보며 새봄을 맞이하라 하셨다. 그러나 나는 농촌에서 자라 그런지, 진달래꽃보다는 냉이와 씀바귀를 캐보지 않고, 봄을 보낸다면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서운하다.

   삼월 하순, 앞당겨 온 봄으로 여린 나뭇가지에도 새 눈이 나왔다. 아파트 주변에 산수유, 개나리, 목련, 봄꽃들이 다투어 꽃술을 열고, 봄빛도 찬란하다.  삼동(三冬)을 이겨낸 어린생명들, 하루하루 모습이 다르다.

 

   우리 집에서 안양은 5분 거리다. 한참 예쁘게 나왔을 냉이와 씀바귀가 궁금해, 며칠을 벼르다가 나는 차에 올랐다. 안양으로 가다가 ‘박달동’으로 접어들어 삼십 분쯤 달리다 보면, ‘물왕리’라는 마을이다. 그리 크지 않은 저수지를 안고, 뒤편에는 밤나무가 있는 중간 산이고, 왼쪽으로는 골을 따라 논과 밭이 펼쳐져있는 전답(田畓)이다. 이곳은 내가 봄만 되면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찾아오는 곳이다. 건너편에 낯선 건물 하나 지어져 있고는 지난봄 그대로다. 나는 논두렁길로 접어든다. 가을걷이를 하고 쌓아둔 참깨 단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고추를 따고 뽑지 않은 고춧대 사이에 냉이와 씀바귀가 실하다. 마침 간밤에 내린 봄비로 밭이랑은 마냥 부드럽다. 흙을 듬뿍 떠서, 씀바귀 한 뿌리, 냉이 한 뿌리, 캐보니 향긋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래, 이 냄새야, 이것이 봄 냄새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일 년 만에 맡아보는 향기는 머리속이 개운하다.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봄나물을 캘 때면 나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촉촉한 흙을 만져보는 것도 좋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좋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이 목을 감싸고 둔덕에 앉아 있으면 고향처럼 편안하다. 봄이면 들로 냇가로 함께 하던 동무들, 그리고 정든 산하(山河), 고향이 그리워

   해마다 하는 나만의 행사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 충청도는 내륙지방이다. 이맘때가 되면 냉이, 씀바귀, 달래, 벌금다지, 지칭개, 돌미나리, 그야말로 천지간이 나물이다. 그중에도 어머니는 냉잇국과 씀바귀나물을 자주 상에 올리셨다. 농사를 지으셨던 아버지는 유독 씀바귀나물을 좋아하셨고, 나 역시 들나물을 많이 먹고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봄이었지 싶다. 그날도 대장간 집 딸, 필순이와 바구니랑 호미를 챙겨 나물 캐러 들로 나섰다. 산을 개간해서 일군 끝자락 비탈밭에 냉이와 씀바귀가 많았다. 우리는 재잘거리며 신명 나게 나물을 캐서 바구니에 담고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게서 나오지 못 혀” 

   돌아보니, 호랑이라고 별호가 붙은 키 작은할아버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물 캐는 재미에 보리 순이 뒤집히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거다. 가슴이 철렁했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고, 필순이의 큰 눈은 더 커졌다.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구니를 내동댕이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산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남 서방 딸인지 다 안다.” 

   악을 쓰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꾸중을 들을 걱정에 미적미적 놀다가 해거름에 집에 들어 가니, 바구니는 댓돌 위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물도 좋지만 보리를 망쳐서는 안 되지”

  아버지는 뜻밖에도 웃고 계셨다. 그 아버지 세상 떠나신지 이십여 년이다. 이제는 아버지를 닮아 나는 씀바귀나물을 퍽이나 좋아한다. 어쩌다 몸살이 나도 생각나는 음식은 씀바귀나물과 냉이 국이다. 냉이는 콩가루를 묻혀 된장국을 끓이고, 씀바귀는 살짝 데쳐서, 고추장과 식초, 약간의 설탕, 그리고 갖은 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무치면, 쌉싸래하면서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그것도 금세지은 따끈한 밥과 함께 먹으면 잃었던 입맛을 찾기에는 그만한 음식이 없지 싶다. 

  

  동의보감에 보면 ‘다년초 씀바귀는 성질은 차고 맛은 쓰나, 독이 없다. 오장육부에 나쁜 기운을 제거시켜주고 여름에는 더위를 먹지 않게 해주며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  쓴맛은 위를 자극하여 소화촉진을 돕고 입맛을 좋게 하여 봄의 나른함을 잊게 해 준다’라고 설명이 되어 있으니, 봄이면 찾아오는 춘곤증에 탁월한 식단이라 생각된다.

 

   한참을 캐다 보니 냉이와 씀바귀가 바구니에 가득하다. 질펀히 앉아 쉬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까치 한 마리가 깨 단을 뒤진다. 고개를 연방 쫑긋거리더니 ‘깍깍 까르르’ 노래 한 곡 들려주고 날아간다. 온갖 나물들이 돋아나는 싱그러운 봄, 입맛도 옛날로 돌아가고 마음도 고향으로만 간다. 질그릇처럼 투박해서 뿌리치기만 했던 아버지 손길도, 이제는 가슴 아리게 그립다. 고향이란 나서 자란 곳 별날 것도 없지만, 부모님과 형제가 있었고 유년의 추억이 있는 곳, 고향은 늘 그렇게 가슴 한곳에 남아 그리움으로 미소 짓게 하나보다.

   오늘은 결혼해서 가까이 사는 딸 불러, 씀바귀나물 무치고 냉잇국 끓여 봄나물 잔치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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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만난 클래식  -월간문학발표-


    솨 -아 바람이 분다. 

    드넓은 평야에 키가 큰 호밀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열한 살 자리 꼬마는 눈을 감고 그 움직임의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다. 그리고 이내 양팔을 벌려 지휘를 한다. 지그시 감은 소년의 얼굴은 마치 달콤한 꿈속을 거니는 듯 행복해 보인다. 시네라마로 다가오는 밀밭과 소년, 자연을 배경으로 한 영상은 감동으로 다가 왔다.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아빠와 첼리스트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특별한 음의 감각을 갖고 있는 소년 ‘어거스트’,  부모의 신분 차이로 외조부에게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라게 된 아이는, 입양을 거부하고 엄마 아빠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기차를 탄다.  레일 위를 달리는 바퀴소리도 음악으로 듣고, 주변에서 들리는 잡음까지도 곡(曲)으로 듣는다. 음악의 천재성을 가진 아이,  우여곡절 끝에  뉴욕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고, 마침내 공연장에서 애타게 그리던 가족을 만난다.  밀밭에서 바람소리를 지휘하던 소년은 청중을 향해 지휘봉을 힘차게 휘젓는다.  며칠 전에 본 ‘어거스트 러쉬’라는 영화 내용이다. 스토리는 단편 소설을 보는 듯 했지만, 내 가슴에 감흥으로 남아있는 것은 11세 소년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는 것이었다.

  잎들이 반짝이는 오월, 요즘에 내가 듣는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중의 봄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지만, 다시 한 번 음미하며 들어보니 느낌이 새롭다. 

 

  ‘신나는 봄이 와

  새들은 흥겨이 노래하며 반기고

  냇물은 산들 바람실어

  도란도란 흘러간다.’ 

 

  유럽서정시의 한 형식인 14행시 (소네트)가 소개하는 글에 있다.  봄 1악장, 빠르기를 지시하는 알레그로, 곡은 마치 맑은 호수에서 진주처럼 영롱한 물방울이 마구 튀어 오르는 듯, 생동감이 전해 온다.  찬란한 봄의 기쁨이 표출되어있고 생명이 숨 쉬는 움직임이 들린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활기찬 봄, 아름다운 음률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간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클래식, 우연히 만난 한편의 영화 덕에 무지했던 귀가 열린다.

 

  지난해 타계하신 내 스승님은 클래식음악을 즐겨 들으셨다. 브람스 교향곡 제1번,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바흐 , 쇼팽, 모차르트, 음반을 바꾸어 걸어드리면서도 건성으로 들었다.

  “음악을 듣다보면 그들의 영혼과 만나는 것 같아”

  곡을 들으시며 말씀하셨을 때도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무식꾼 그 자체였다. 

   초여름으로 가는 유월, 로테르담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알리는 기사가 일간지에 실렸다. 나는 작심을 하고 예매를 했다. 객석을 메운 청중은 숨을 죽이고 있다.  이윽고 지휘계의 젊은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야닉네제 세겐이 무대로 나와 인사를 한다.  창단 된지 90년이라고 했다. 오늘 연주하는 곡은 소련의 음악가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891~1953)의 교향곡 5번 D단조 작품47’이다.  악기를 안고 있는 70여명의 단원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1악장 서곡이 흐른다. 화려한 선율에 바이올린, 차분한 음색의 비올라, 그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이 홀을 감싸 안는다.  이어 경쾌한 왈츠에선 우아하게 춤을 추는 남녀 한 쌍이 그려진다.  중후한 음을 지닌 콘트라베이스, 그리고 첼로, 클라리넷, 트럼본 ,하프, 팀파니, 트럼펫, 그 외에 많은 악기들이 내는 다양한 음색에 나는 놀라고 있었다.  때로는 커다란 산이 다가오는 듯 장대하고, 때로는 거대한 파도가 질풍노도하며 달려오는 것 같이 웅장했다.  부드럽고 강렬하고 그런가하면 플루트의 맑고 깨끗한 소리는 깨어나는 아침 숲 속으로 나를 안내했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들리는 듯 내 마음은 더 없이 평화로워진다.  지휘봉을 손에든 야닉은 음을 따라 크고 작게 온 몸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단원들의 손놀림 또한 물결처럼 움직인다.  신비스런 현(絃)에 도취되어 시종일관 나는 눈을 감고 감상을 했다. 로테르담필하모니의 탄탄한 연주는 너무도 완벽한 앙상블이었다.

 

    오늘 연주되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은, 투쟁에서 승리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1937년 발표한 곡으로 ‘스탈린의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 이었다’라고 표기되어있다.  4반세기를 독재적으로 통치하던 시기,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소련을 핵시대로 이끈 그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이 작품 속에 녹아 있었다.  정치적 공포감, 애수에 찬 번뇌와 침통함이, 그런가하면 다시 희망과 기쁨, 그 모든 것이 4악장에 걸쳐 표현되어 있었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역정(歷程)이 들어있었다고 해야 할까. 두 시간여 공연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과 여린 감성까지도 섬세하게 표현 해내는 클래식, 그 마법과도 같은 곡을 만든 음악가들은, 일찍이 자연의 숨소리를,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었다.  앙코르곡까지 듣고 자리를 떠나며, 그들의 영혼과 만나는 것 같다고 하셨던 스승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였는지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요. 귀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소년 어거스트가 한 말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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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발은 하얗고 조그마하다.

  소화를 돕는 다는 첫 번째 발가락아래, 상응점을 찾아 꼭꼭 눌러 드린다.

  “ 그만 됐다.” 나이든 딸 팔 아플까봐 그만 하라 하신다. 어머니는 올해 87세시다. 요즘 노환으로 고생하시어 마음이 아프다. 영영 떠나시는 줄 알고 놀란 적도 몇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헌데 이번에는 심상치가 않다. 언니랑 여동생, 우리는 주중에도 주말에도 안산 어머니 곁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말동무 해 드린다. 마흔셋에 막내아들을 낳으셨는데, 고맙게도 그 아들 덕에 말년을 편안하게 지내시고 있다.  남들은 편찮으시다 하면 ‘수를 하셨네.’ 하지만 내 가슴은 무쇠 덩이를 얹혀놓은 듯 무겁다. 어느 자식이 부모님 환후(患候)에 마음 편할까만 나는 유독 지은 죄가 크다.

  “엄마 죄송해요. 늘 걱정만 드리고 ”

  “팔자인걸, 아이들이 잘 컸으니 이젠 괜찮을 거다. 그리고 울지들 마라. 살만큼 살았고 때가 되어 가는 거니”

어머니를 중심으로 모두 둘러앉았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다. 아플 때마다 너희가 잘해주어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와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 동생도 나도 울음보가 터졌다.

  삼년 전 만해도 여름휴가를 함께 하셨다. 그해는 딸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땅으로 떠났다. 멀지 않은 충청북도속리산, 그곳은 돌아가신 아버님과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어머님께서 즐겨 드시는 다슬기국은 법주사 인근에서 빠지지 않는 식단이다. 화양계곡에선 백숙을, 신탄진 묵 마을도 들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식단을 찾아 일정을 잡았다. 자그만 키에 하얀 모시 한복을 입은 어머니는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고 단아 하셨다. 법주사 앞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할머니 젊으셨을 땐 참 고우셨겠어요.” 식당 아주머니 말이다. 방금 지은 따끈한 밥에 다슬기와 시래기를 듬뿍 넣은 국이 한 그릇 더 나왔고, 친정어머니가 생각난다며 주방 아주머니는 찬도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었다. 어머니는 맛있게 드셨다. 법주사 경내를 보려면 오리 숲을 걸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어머니는 무리일 것 같았다. 무슨 수가 없을까 궁리를 하던 차에, 119구급차가 보였다.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청하니 흔쾌히 승낙해준다. 긴급차량이라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덕분에 우리 딸들은 효도 할 수 있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화양계곡에서 먹는 백숙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가는 곳마다 어른을 우대하는 예의와 정이 있어 ‘살기 좋은 세상’ 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천(山川)도 수려하고 인심도 좋고 ,어른과 동행하니 우리도 대접을 받는다. 괴산을 지날 무렵, 장독대에 늘 심으셨던 빨간 맨드라미를 보시곤 반갑다하셨다.

“ 형님 형님 시집살이 어떱디까, 애고 애고 말도 마라, 시집살이 눈치 살이, 고추 당초(唐椒) 맵다 한들 시집살이 더 맵더라.”  어머니는 뒤 좌석에 앉으셔서 노래를 하셨다. 우리는 따라 부르며 박수를 쳐드렸다.


  시계가 자정을 알린다. 그만들 가라고 손짓을 하신다. 자식살림을 염려하심이다. 위급한 상황이오면 바로 연락을 하겠다는 막내 남동생의 말을 듣고 나는 차에 올랐다. 칠흑같이 캄캄한 안산고속도로- 내 마음만큼 어둡고 적막했다. 어머니 없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언제나 따듯하게 보살펴 주셨다. 덕분에 아이들도 다 자랐고 나도 건강하다. 그 은혜를 말로 어찌 다하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큰 사랑 때문이리라. 어머니는 내 삶에 버팀목이었고 든든한 후원자였다. 어머니가 생전에 계시다는 것, 그것은 분명 홍복(洪福)이었다. 이른 새벽 전화가 울린다. 혹시나 하여 가슴이 내려 않는다. 수화기를 드니 막내다.

  “ 누나, 엄마드릴 좋은 약 없을까. 영양주사를 삼일 간격으로 놔드리면 어떨까. 엄마가 돌아가신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해, 한 삼년만 더 계셨으면 좋겠어.” 말끝을 흐린다. 젖이 모자라 암죽으로 키운 막냇동생, 내 등에 오줌을 싸대더니 어머니를 생각하는 신통한 말에, 한동안 찡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막내 말대로 다시 한번 해 보자. 우리는 합심을 했다. 언니는 보약을, 나는 영양제를, 동생은 순한 주사약을, 막내 댁은 부드러운 곰국을, 부드러운 빵과 인절미도 마련하고 어떻게든 입맛을 찾으셔야 한다는 생각이다.

  “엄마 막내가요 돌아가실까 봐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데요. 우리도 그렇고요, 힘내셔서 일어나셔야 해요.” 그러기를 달 반 어머니는 차도가 있으셨다. 요즘에는 주말에만 찾아뵙는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자네 덕이야”

  “ 제가 뭘요. 형님들이 하시면서” 막내 올케는 말한다. 연세가 있으셔서 얼마나 더 우리 곁에 계실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다시 웃음을 찾으셨고 거동도 하신다. 내년 봄에는 막내가 만들어 드린 미니 옥상 밭에 상추며 쑥갓, 오이 고추, 그 예쁜 푸성귀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요즘 내가 알게 된 것은 효심으로 드리는 약은 효과가 두 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의 수명도 자식의 정성에 따라 연장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10월초 새털구름이 멋지다. 오늘은 내 마음도 깃털처럼 가볍다. 다들 모이는 주말,  살이 오른 꽃게를 샀다.

  “ 어머니 우리 왔어요.” 손을 잡으니 빙그레 웃으신다.  나는 가슴이 저려와 어머니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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