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리와 기슭을 뒤덮고, 붉게 물들인 진달래의 만발한 무리를 보지 않고 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우송(友松) 김태길선생님은 ‘아름다운 세상’이란 글에 만발한 진달래꽃을 보며 새봄을 맞이하라 하셨다. 그러나 나는 농촌에서 자라 그런지, 진달래꽃보다는 냉이와 씀바귀를 캐보지 않고, 봄을 보낸다면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서운하다.

   삼월 하순, 앞당겨 온 봄으로 여린 나뭇가지에도 새 눈이 나왔다. 아파트 주변에 산수유, 개나리, 목련, 봄꽃들이 다투어 꽃술을 열고, 봄빛도 찬란하다.  삼동(三冬)을 이겨낸 어린생명들, 하루하루 모습이 다르다.

 

   우리 집에서 안양은 5분 거리다. 한참 예쁘게 나왔을 냉이와 씀바귀가 궁금해, 며칠을 벼르다가 나는 차에 올랐다. 안양으로 가다가 ‘박달동’으로 접어들어 삼십 분쯤 달리다 보면, ‘물왕리’라는 마을이다. 그리 크지 않은 저수지를 안고, 뒤편에는 밤나무가 있는 중간 산이고, 왼쪽으로는 골을 따라 논과 밭이 펼쳐져있는 전답(田畓)이다. 이곳은 내가 봄만 되면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찾아오는 곳이다. 건너편에 낯선 건물 하나 지어져 있고는 지난봄 그대로다. 나는 논두렁길로 접어든다. 가을걷이를 하고 쌓아둔 참깨 단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고추를 따고 뽑지 않은 고춧대 사이에 냉이와 씀바귀가 실하다. 마침 간밤에 내린 봄비로 밭이랑은 마냥 부드럽다. 흙을 듬뿍 떠서, 씀바귀 한 뿌리, 냉이 한 뿌리, 캐보니 향긋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래, 이 냄새야, 이것이 봄 냄새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일 년 만에 맡아보는 향기는 머리속이 개운하다.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봄나물을 캘 때면 나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촉촉한 흙을 만져보는 것도 좋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좋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이 목을 감싸고 둔덕에 앉아 있으면 고향처럼 편안하다. 봄이면 들로 냇가로 함께 하던 동무들, 그리고 정든 산하(山河), 고향이 그리워

   해마다 하는 나만의 행사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 충청도는 내륙지방이다. 이맘때가 되면 냉이, 씀바귀, 달래, 벌금다지, 지칭개, 돌미나리, 그야말로 천지간이 나물이다. 그중에도 어머니는 냉잇국과 씀바귀나물을 자주 상에 올리셨다. 농사를 지으셨던 아버지는 유독 씀바귀나물을 좋아하셨고, 나 역시 들나물을 많이 먹고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봄이었지 싶다. 그날도 대장간 집 딸, 필순이와 바구니랑 호미를 챙겨 나물 캐러 들로 나섰다. 산을 개간해서 일군 끝자락 비탈밭에 냉이와 씀바귀가 많았다. 우리는 재잘거리며 신명 나게 나물을 캐서 바구니에 담고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게서 나오지 못 혀” 

   돌아보니, 호랑이라고 별호가 붙은 키 작은할아버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물 캐는 재미에 보리 순이 뒤집히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거다. 가슴이 철렁했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고, 필순이의 큰 눈은 더 커졌다.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구니를 내동댕이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산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남 서방 딸인지 다 안다.” 

   악을 쓰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꾸중을 들을 걱정에 미적미적 놀다가 해거름에 집에 들어 가니, 바구니는 댓돌 위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물도 좋지만 보리를 망쳐서는 안 되지”

  아버지는 뜻밖에도 웃고 계셨다. 그 아버지 세상 떠나신지 이십여 년이다. 이제는 아버지를 닮아 나는 씀바귀나물을 퍽이나 좋아한다. 어쩌다 몸살이 나도 생각나는 음식은 씀바귀나물과 냉이 국이다. 냉이는 콩가루를 묻혀 된장국을 끓이고, 씀바귀는 살짝 데쳐서, 고추장과 식초, 약간의 설탕, 그리고 갖은 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무치면, 쌉싸래하면서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그것도 금세지은 따끈한 밥과 함께 먹으면 잃었던 입맛을 찾기에는 그만한 음식이 없지 싶다. 

  

  동의보감에 보면 ‘다년초 씀바귀는 성질은 차고 맛은 쓰나, 독이 없다. 오장육부에 나쁜 기운을 제거시켜주고 여름에는 더위를 먹지 않게 해주며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  쓴맛은 위를 자극하여 소화촉진을 돕고 입맛을 좋게 하여 봄의 나른함을 잊게 해 준다’라고 설명이 되어 있으니, 봄이면 찾아오는 춘곤증에 탁월한 식단이라 생각된다.

 

   한참을 캐다 보니 냉이와 씀바귀가 바구니에 가득하다. 질펀히 앉아 쉬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까치 한 마리가 깨 단을 뒤진다. 고개를 연방 쫑긋거리더니 ‘깍깍 까르르’ 노래 한 곡 들려주고 날아간다. 온갖 나물들이 돋아나는 싱그러운 봄, 입맛도 옛날로 돌아가고 마음도 고향으로만 간다. 질그릇처럼 투박해서 뿌리치기만 했던 아버지 손길도, 이제는 가슴 아리게 그립다. 고향이란 나서 자란 곳 별날 것도 없지만, 부모님과 형제가 있었고 유년의 추억이 있는 곳, 고향은 늘 그렇게 가슴 한곳에 남아 그리움으로 미소 짓게 하나보다.

   오늘은 결혼해서 가까이 사는 딸 불러, 씀바귀나물 무치고 냉잇국 끓여 봄나물 잔치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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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만난 클래식  -월간문학발표-


    솨 -아 바람이 분다. 

    드넓은 평야에 키가 큰 호밀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열한 살 자리 꼬마는 눈을 감고 그 움직임의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다. 그리고 이내 양팔을 벌려 지휘를 한다. 지그시 감은 소년의 얼굴은 마치 달콤한 꿈속을 거니는 듯 행복해 보인다. 시네라마로 다가오는 밀밭과 소년, 자연을 배경으로 한 영상은 감동으로 다가 왔다. 

   밴드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아빠와 첼리스트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특별한 음의 감각을 갖고 있는 소년 ‘어거스트’,  부모의 신분 차이로 외조부에게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라게 된 아이는, 입양을 거부하고 엄마 아빠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기차를 탄다.  레일 위를 달리는 바퀴소리도 음악으로 듣고, 주변에서 들리는 잡음까지도 곡(曲)으로 듣는다. 음악의 천재성을 가진 아이,  우여곡절 끝에  뉴욕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고, 마침내 공연장에서 애타게 그리던 가족을 만난다.  밀밭에서 바람소리를 지휘하던 소년은 청중을 향해 지휘봉을 힘차게 휘젓는다.  며칠 전에 본 ‘어거스트 러쉬’라는 영화 내용이다. 스토리는 단편 소설을 보는 듯 했지만, 내 가슴에 감흥으로 남아있는 것은 11세 소년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는 것이었다.

  잎들이 반짝이는 오월, 요즘에 내가 듣는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중의 봄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지만, 다시 한 번 음미하며 들어보니 느낌이 새롭다. 

 

  ‘신나는 봄이 와

  새들은 흥겨이 노래하며 반기고

  냇물은 산들 바람실어

  도란도란 흘러간다.’ 

 

  유럽서정시의 한 형식인 14행시 (소네트)가 소개하는 글에 있다.  봄 1악장, 빠르기를 지시하는 알레그로, 곡은 마치 맑은 호수에서 진주처럼 영롱한 물방울이 마구 튀어 오르는 듯, 생동감이 전해 온다.  찬란한 봄의 기쁨이 표출되어있고 생명이 숨 쉬는 움직임이 들린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활기찬 봄, 아름다운 음률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간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클래식, 우연히 만난 한편의 영화 덕에 무지했던 귀가 열린다.

 

  지난해 타계하신 내 스승님은 클래식음악을 즐겨 들으셨다. 브람스 교향곡 제1번,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바흐 , 쇼팽, 모차르트, 음반을 바꾸어 걸어드리면서도 건성으로 들었다.

  “음악을 듣다보면 그들의 영혼과 만나는 것 같아”

  곡을 들으시며 말씀하셨을 때도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무식꾼 그 자체였다. 

   초여름으로 가는 유월, 로테르담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알리는 기사가 일간지에 실렸다. 나는 작심을 하고 예매를 했다. 객석을 메운 청중은 숨을 죽이고 있다.  이윽고 지휘계의 젊은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야닉네제 세겐이 무대로 나와 인사를 한다.  창단 된지 90년이라고 했다. 오늘 연주하는 곡은 소련의 음악가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891~1953)의 교향곡 5번 D단조 작품47’이다.  악기를 안고 있는 70여명의 단원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1악장 서곡이 흐른다. 화려한 선율에 바이올린, 차분한 음색의 비올라, 그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이 홀을 감싸 안는다.  이어 경쾌한 왈츠에선 우아하게 춤을 추는 남녀 한 쌍이 그려진다.  중후한 음을 지닌 콘트라베이스, 그리고 첼로, 클라리넷, 트럼본 ,하프, 팀파니, 트럼펫, 그 외에 많은 악기들이 내는 다양한 음색에 나는 놀라고 있었다.  때로는 커다란 산이 다가오는 듯 장대하고, 때로는 거대한 파도가 질풍노도하며 달려오는 것 같이 웅장했다.  부드럽고 강렬하고 그런가하면 플루트의 맑고 깨끗한 소리는 깨어나는 아침 숲 속으로 나를 안내했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들리는 듯 내 마음은 더 없이 평화로워진다.  지휘봉을 손에든 야닉은 음을 따라 크고 작게 온 몸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단원들의 손놀림 또한 물결처럼 움직인다.  신비스런 현(絃)에 도취되어 시종일관 나는 눈을 감고 감상을 했다. 로테르담필하모니의 탄탄한 연주는 너무도 완벽한 앙상블이었다.

 

    오늘 연주되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은, 투쟁에서 승리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1937년 발표한 곡으로 ‘스탈린의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 이었다’라고 표기되어있다.  4반세기를 독재적으로 통치하던 시기,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소련을 핵시대로 이끈 그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이 작품 속에 녹아 있었다.  정치적 공포감, 애수에 찬 번뇌와 침통함이, 그런가하면 다시 희망과 기쁨, 그 모든 것이 4악장에 걸쳐 표현되어 있었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역정(歷程)이 들어있었다고 해야 할까. 두 시간여 공연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과 여린 감성까지도 섬세하게 표현 해내는 클래식, 그 마법과도 같은 곡을 만든 음악가들은, 일찍이 자연의 숨소리를,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듣고 있었다.  앙코르곡까지 듣고 자리를 떠나며, 그들의 영혼과 만나는 것 같다고 하셨던 스승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였는지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요. 귀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소년 어거스트가 한 말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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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2일 석수 초등학교 꿈나무들의 입학식이 있었다.
입학풍경도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가슴에 손수건도 매달지 않았다.
그러나 초롱초롱 눈망울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공부도 열심히, 씩씩하고 착한 아이로 자라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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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수’의 정지용 문학관을 가다


 

    ‘넓은 벌 동족 끝으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가 즐겨 부르는 정지용의 시 ‘향수’ 앞부분이다.  초가을로 접어든 삽상한 바람이 부는 날, 충북옥천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을 찾았다. 


  1996년 원형대로 복원되었다는 생가는 옥천군 하계리에 단출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부엌하나, 안방, 건넛방, 툇마루, 그리고 초가지붕이 정겹다.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항상 문을 열어 놓았다.


  그의 아버님이 한약방을 했을 때 쓰였던 가구가 방 한곳에 그대로 놓여있고, 그 위에 언제 읽어도 좋은 시 한수 걸려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생가 앞에는 깔끔하게 조성된 문학관이 들어섰고, 뜰에는 정지용의 동상이 서있다.  실내로 들어가니 안내원이 반갑게 맞아 준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지용의 모형이 않자있는데,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옆에 앉아 촬영도 한다.  실내에는 작곡가 김희갑씨가 곡을 만들었다는 정지용의 ‘향수’가 박인수의 목소리로 은은하게 들린다.

  전시실에는 지용의 출생과 문학의 발자취가 차례대로 진열되어 있다.  지용연보가 있고 현대시의 흐름과 생전에 그의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1930년대는 시단에 중요한 위치에 올라 ‘청록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발굴했으며, 그 외도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1935년에 발간된 그의 시, 산문, 초간집이 있어 반가웠고, 영상실 에서는 휘문고 영어교사를 역임했던 시절, 이화전문대 교수 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를 낭송해 보는 기기가 문학체험 실에 있어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시인이 된 듯 낭송을 해보아도 좋다.


   정지용의 ‘향수’는 초기 작품 중에도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구체적으로 읊고 있고, 상상으로 그리는 세계가 아니라 자기 살던 고향을 그리움으로 읊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라는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망국의식과 함께 고향을 회복하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한다.   

  

  영문학자이기도 한 정지용은 말의 오묘함을 최대로 구사하는 천재성을 가진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0년대 구인회를 중심으로 동인 활동을 했으며, 사춘기부터 시를 썼다는 그는 일본 사람이 무서워 산으로 바다로 피해 다니며 시를 썼단다.  무엇보다도 일제식민지 시대 민족이 겪는 고통을 인내하며 살아간 지식인의 고뇌를 엿 볼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난 1902년은 조선의 말기로 일본에 의해 국운이 쇠퇴해 가는 시기였다. 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나라를 잃고 일본의 탄압 속에서 어려움이 많았던 세월이었다. 1950년 6 25전쟁이 일어나자 정치 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평양 감옥으로 이감된 후에 안타깝게도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그의 나이 49세였다.   

 

   매년 5월이면 지용제가 있고, 지용 백일장, 연변 지용 시 문학상, 다채로운 행사가 이곳 옥천에서 열리고 있다한다.  생가를 뒤로 하고 돌아가는 길, 그 앞에 여전히 실개천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시 ‘향수’는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실버넷뉴스 남순자 기자   mulori45@silver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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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발은 하얗고 조그마하다.

  소화를 돕는 다는 첫 번째 발가락아래, 상응점을 찾아 꼭꼭 눌러 드린다.

  “ 그만 됐다.” 나이든 딸 팔 아플까봐 그만 하라 하신다. 어머니는 올해 87세시다. 요즘 노환으로 고생하시어 마음이 아프다. 영영 떠나시는 줄 알고 놀란 적도 몇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헌데 이번에는 심상치가 않다. 언니랑 여동생, 우리는 주중에도 주말에도 안산 어머니 곁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말동무 해 드린다. 마흔셋에 막내아들을 낳으셨는데, 고맙게도 그 아들 덕에 말년을 편안하게 지내시고 있다.  남들은 편찮으시다 하면 ‘수를 하셨네.’ 하지만 내 가슴은 무쇠 덩이를 얹혀놓은 듯 무겁다. 어느 자식이 부모님 환후(患候)에 마음 편할까만 나는 유독 지은 죄가 크다.

  “엄마 죄송해요. 늘 걱정만 드리고 ”

  “팔자인걸, 아이들이 잘 컸으니 이젠 괜찮을 거다. 그리고 울지들 마라. 살만큼 살았고 때가 되어 가는 거니”

어머니를 중심으로 모두 둘러앉았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다. 아플 때마다 너희가 잘해주어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와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 동생도 나도 울음보가 터졌다.

  삼년 전 만해도 여름휴가를 함께 하셨다. 그해는 딸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땅으로 떠났다. 멀지 않은 충청북도속리산, 그곳은 돌아가신 아버님과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어머님께서 즐겨 드시는 다슬기국은 법주사 인근에서 빠지지 않는 식단이다. 화양계곡에선 백숙을, 신탄진 묵 마을도 들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식단을 찾아 일정을 잡았다. 자그만 키에 하얀 모시 한복을 입은 어머니는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고 단아 하셨다. 법주사 앞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할머니 젊으셨을 땐 참 고우셨겠어요.” 식당 아주머니 말이다. 방금 지은 따끈한 밥에 다슬기와 시래기를 듬뿍 넣은 국이 한 그릇 더 나왔고, 친정어머니가 생각난다며 주방 아주머니는 찬도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었다. 어머니는 맛있게 드셨다. 법주사 경내를 보려면 오리 숲을 걸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어머니는 무리일 것 같았다. 무슨 수가 없을까 궁리를 하던 차에, 119구급차가 보였다.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청하니 흔쾌히 승낙해준다. 긴급차량이라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덕분에 우리 딸들은 효도 할 수 있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화양계곡에서 먹는 백숙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가는 곳마다 어른을 우대하는 예의와 정이 있어 ‘살기 좋은 세상’ 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천(山川)도 수려하고 인심도 좋고 ,어른과 동행하니 우리도 대접을 받는다. 괴산을 지날 무렵, 장독대에 늘 심으셨던 빨간 맨드라미를 보시곤 반갑다하셨다.

“ 형님 형님 시집살이 어떱디까, 애고 애고 말도 마라, 시집살이 눈치 살이, 고추 당초(唐椒) 맵다 한들 시집살이 더 맵더라.”  어머니는 뒤 좌석에 앉으셔서 노래를 하셨다. 우리는 따라 부르며 박수를 쳐드렸다.


  시계가 자정을 알린다. 그만들 가라고 손짓을 하신다. 자식살림을 염려하심이다. 위급한 상황이오면 바로 연락을 하겠다는 막내 남동생의 말을 듣고 나는 차에 올랐다. 칠흑같이 캄캄한 안산고속도로- 내 마음만큼 어둡고 적막했다. 어머니 없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언제나 따듯하게 보살펴 주셨다. 덕분에 아이들도 다 자랐고 나도 건강하다. 그 은혜를 말로 어찌 다하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큰 사랑 때문이리라. 어머니는 내 삶에 버팀목이었고 든든한 후원자였다. 어머니가 생전에 계시다는 것, 그것은 분명 홍복(洪福)이었다. 이른 새벽 전화가 울린다. 혹시나 하여 가슴이 내려 않는다. 수화기를 드니 막내다.

  “ 누나, 엄마드릴 좋은 약 없을까. 영양주사를 삼일 간격으로 놔드리면 어떨까. 엄마가 돌아가신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해, 한 삼년만 더 계셨으면 좋겠어.” 말끝을 흐린다. 젖이 모자라 암죽으로 키운 막냇동생, 내 등에 오줌을 싸대더니 어머니를 생각하는 신통한 말에, 한동안 찡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막내 말대로 다시 한번 해 보자. 우리는 합심을 했다. 언니는 보약을, 나는 영양제를, 동생은 순한 주사약을, 막내 댁은 부드러운 곰국을, 부드러운 빵과 인절미도 마련하고 어떻게든 입맛을 찾으셔야 한다는 생각이다.

  “엄마 막내가요 돌아가실까 봐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데요. 우리도 그렇고요, 힘내셔서 일어나셔야 해요.” 그러기를 달 반 어머니는 차도가 있으셨다. 요즘에는 주말에만 찾아뵙는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자네 덕이야”

  “ 제가 뭘요. 형님들이 하시면서” 막내 올케는 말한다. 연세가 있으셔서 얼마나 더 우리 곁에 계실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다시 웃음을 찾으셨고 거동도 하신다. 내년 봄에는 막내가 만들어 드린 미니 옥상 밭에 상추며 쑥갓, 오이 고추, 그 예쁜 푸성귀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요즘 내가 알게 된 것은 효심으로 드리는 약은 효과가 두 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의 수명도 자식의 정성에 따라 연장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10월초 새털구름이 멋지다. 오늘은 내 마음도 깃털처럼 가볍다. 다들 모이는 주말,  살이 오른 꽃게를 샀다.

  “ 어머니 우리 왔어요.” 손을 잡으니 빙그레 웃으신다.  나는 가슴이 저려와 어머니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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