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중순, 봄비가 내린다.

  아파트 주변에 있는 개나리가 꽃 피울 채비를 한다. 이맘때가 되면 마음 저편에 접혀있던 아픈 기억이 나를 흔들어 댄다. 1980년 봄, 그날도 가랑비가 내렸다. 큰 트럭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종알대는 꼬맹이들과 충청도 고향에서 서울로 출발했다. 시원하게 뚫린 중부 고속도로 갓 길엔 노란 개나리가 봄비를 머금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결혼생활 9년. 딸아이 셋과 나를 두고 그는 급하게도 먼 길을 떠났다. 부부로 인연을 맺어 자식을 낳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아니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며 변함없이 살라는 말은 혼례서약에 빠지지 않는 약속의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두 사람의 인고(忍苦)를 감당해야 하며,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임을, 우리는 때로 잊고 산다.

  슬픔은 남아 있는 자의 몫이라고 했던가. 그의 빈자리는 어린것들을 하루아침에 아빠 없는 아이들로 만들어 버렸다.   

“울고 싶을 땐 실컷 울어라. 그러나 조만간 울음을 그치고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아라. 좌, 우, 위아래를, 경거망동해선 안 되며 너를 바라보는 눈망울을 생각해라. 침착하게. 침착하게. 침착하게......”침착 하라는 말을 세 번이나 하신, 내 은사님은 소식을 듣고 긴 편지를 보내주셨다. 비로소 나는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란 언제 어떻게 올지 그 누구도 모르는 일, 조금 일찍 떠났을 뿐이라고 납득은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년 탈상을 하고, 시어머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나는 그의 흔적을 뒤로했다.

   이곳 시흥은 서울이라고는 했으나 변두리였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서울과 안양을 오가는 차들의 소음만이 간간이 들렸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조각배, 내 마음은 그랬다. 그로부터 나는 일하는 엄마가 되었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마음도 몸도 바빴다. 그러나 가슴엔 소망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잘 자라 주는 것과, 내가 시작한 일이 아이들과 함께 자라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 무렵, 우연히 박완서 씨의 단편,‘엄마의 말뚝’을 읽게 되었다. 자전적인 소설로 그분의 어머님은 자녀의 장래를 위해 대처(大處)로 나왔다. 삯바느질로 장만한 산꼭대기 허름한 집, 그 집은 자식을 잘 길러 보겠다는 엄마의 굳은 말뚝이 깊게 박혀 있었다. 시대는 달랐으나 뭔가 나에게 한 수 던져주는 것 같았다.

  우선 밝게 컸으면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어린이날은 하던 일을 놓고 아이들과 함께했다. 당시 세종 문화회관 대강당은 오월이면 어린이를 위한 뮤지컬 공연을 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연극을 관람하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파랑새, 피터 팬, 이상한 나라 앨리스, 그 일은 여러 해 계속되었다. 지금은 작고한 분이지만 연극배우 추송웅 씨가 기저귀를 찬 아기 역할을 해서 관객의 박수를 받았고, 가수 윤복희 씨는 마녀로 분장해 열연을 했다. 돌아오는 길엔 조잘조잘 말들이 많았다.

  학기 초에는 잘 보살펴 달라는 편지를 담임선생님께 썼으며, 방학이 되면 엄마가 하는 일을 함께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를 태운 조각배는 그런대로 순항을 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한다고 하지만. 어떤 커다란 섭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며, 어려울 때가 있으면 그 후에 기쁨을 꼭 마련해 놓으신다는 위로의 말을 고향 선배님은 늘 해주셨다. 덧붙여 그대는 잘해낼 수 있을 거라며 힘찬 응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응원에 힘을 얻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도 씩씩하게 털고 일어섰고, 나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도 힘이 생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내 주위에는 따듯한 분들이 있었다. 오랜 세월, 힘들 때 기댈 수 있었다.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뿐이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열심히 일하고 당당하게 살아라.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로운 태양이 솟아오른다.”성년이 된 지금도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말이다. 

                                                              

노란 개나리가 그 동안 몇 번이나 피고 졌는지, 둘째가 결혼과 함께 보금자리를 찾아갔고, 큰아이는 조각을, 막내는 무역 일을 하고 있다. 영원한 타향이 될 거로 생각했던 이곳이 이제는 정이 들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내 삶을 격려해 주었던 사람들, 그 마음을 나는 잊지 못한다. 봄볕이 화사하다. 아파트 주변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다. 이제는 정녕 너를 슬픈 마음으로 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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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내 인생에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다.

   그것은 흐렸던 나의 젊은 날을 다시 맑음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때로 평범한 일상에서 느닷없이 커다란 전환점을 긋고 간다.  삼십대 중반, 한쪽 날개를 잃은 그 혹독한 시기를 나는 책과 함께 보냈다. 이야기책을 좋아 하셨던 아버지 덕에 쉽게 책을 접하긴 했지만,  급작스럽게 바뀐 환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막막함을 견디기 위한 방편이었다.

  

   자주 서점을 찾았다. 뭔가 실 날 같은 삶의 끈이라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만난 책이 당시 철학 교수이셨던 김태길 교수님의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라는 책이었다.  평범한 일상과 인간의 삶, 그 광대한 분야를 심도(心度) 있게 다루고 있었다. ‘삶이란 어떤 환경에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일이 있다’는 글귀를 읽으며, 희미하게나마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기 시작 했다. 그 책은 나의 소중한 보물로 책장에 꽂혀있다.

  나는 책이라는 창을 통해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동안 책을 가까이했다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은 단 한 가지의 덕목(德目)이다.

   이 십 여년의 세월을 생업에 종사하며 틈틈이 책을 읽었다. 제목이 좋아서 아니면 서문에 끌려서, 혹은 일간지에 소개된 신간을 골랐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엿보기도 하고 그들의 생각을 읽어갔다. 책장을 넘기며 웃고 울고 나도 모르게 내 가슴은 감동으로 파도를 쳤다. 그리고 밑줄을 그었다. 점차 글을 쓴 작가마다 독특한 향기가 있음도 알게 되었고 저마다 색채가 느껴졌다. 아름답고 오묘한 언어에 매료되어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하여 수필가란 이름을 얻은 지 십년이다

 

  어느 해인가 과천 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본관 입구 잔디밭에 큰 사람이 서 있었다.  7척 장신의 사람은 외국작가가 만든 조형물이었다. 그 사람은 미술관을 뒤로하고 먼 산을 바라보며 ‘어-어-어’ 하고 리듬이 섞인 소리를 간헐적으로 내고 있었다.  제목을 보니 역시 ‘노래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노래라기보다는 마치 세상을 향해 하고픈 이야기가 많아 계속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노래하는 사람처럼 세상을 향해 하고픈 말이 많은 것인가.  그때 내 가슴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림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풀어갔다. 딸아이들을 보며 짠한 마음을 썼고 그 아이들을 보며 내 소망을 써 내려갔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름대로 사유(思惟)의 뜰을 거닐며 침묵했다.  한을 풀 듯 가슴속에 고인 물을 퍼냈다.  나의 글이 논픽션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임을 변명하지 않는다.  고인 물을 퍼내면 맑은 물이 고이듯, 내 마음속에 있던 앙금은 퍼 낸 만큼 맑은 물로 바뀌고 있었다.

   사회성이 부족해 편협했던 성격도 조금씩 너그러워졌다. 계절 따라 피는 꽃들, 창밖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들,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인근에 있는 산행으로 하루를 연다. 낙엽을 밟으며 오르는 산은 늘 새롭다.  다람쥐 한 쌍이 겨울 준비를 하는지 부산하다. 나도 계절로 치면 가을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안개가 자욱한 산길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  허나 혼신을 다해 쓴 글이 활자화되면 그 희열이 기쁨으로 이어진다. 

   글감은 일상에서 특별히 경험하게 되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데, 인간의 정이 느껴지는 이웃 이야기, 혹은 따듯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글이 쓰고 싶어진다.  어떤 주제가 정해지면 며칠이고 생각에 잠긴다.  너럭바위에 앉아 혹은 잣나무 사이를 거닐며 글감을 정리한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떻게 맺을 것인가, 그런대로 초안이 잡히면 글쓰기를 시작한다. 

  유머가 있고 위트가 있는 글, 그리고 해학과 품격이 있는 글을 쓰고 싶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이다.  다만 독자가 내 글을 읽으며 한번쯤 빙그레 웃어만 준대도 나로서는 감사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청명하고 맑은 날의 글을 쓰고 싶다. 살아있는 것이 무엇이고 기쁨이 무엇인지, 그것들과 대화하고 싶다. 우리네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이 울림으로 다가오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Posted by 물오리
 

    


    ‘누구의 주제런가 높고 고운 산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조수미의 고운 목소리를 따라 흥얼거렸던 가곡금강산이다.

    그 아름다운 산을 정해(丁亥)년 오월에 친구들과 가는 길이다.  38선이라는 선을 긋고 국토가 반으로 토막난지 55여 년,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 그리고 금강산, 산수가 빼어나 불리는 이름이 계절마다 다른 명산을 드디어 찾아가는 것이다. 가깝다는 이유로, 혹여 녹슨 철마가 다시 달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미루었던 곳이다.    

   화진포아산 휴게소에서 등록을 마치고 오후 3시경 버스는 북쪽을 향했다.  철새들만 넘나든다는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지나 40여 명을 태운 차는 서서히 움직인다.  둥글게 걸쳐있는 철조망이 보이고, 소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민둥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윽고 북측 검문이다. 사람보다는 빨간 줄이 선명하게 박혀있는 제복이 먼저 눈에 띈다. 순간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상잔의 6 . 25, 지금은 아니 계시지만, 인민군이라면 치를 떨듯 두려워하셨던 내 어머니,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공포로 고조되었던 순간들, 그 유년의 기억이 아슴아슴 살아났다.  막상 그들을 마주하고 보니,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기분이 착잡했다.  검열하는 동안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 있고, 촬영 금지며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들었을 때, 역시 이곳은 자유스럽지 못한 곳임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드문드문 엎드려있는 집들은 마치 1960년대를 연상케 한다.  남강다리를 건너 숙소에 들자 해는 하루를 닫으려한다.  창을 열어 밖을 보니 파란 바다와 해금강 호텔이 멀리 보인다.  해변은 고즈넉하다. 산과 바다, 그리고 모래밭, 아무리 둘러보아도 전혀 낯설지가 않은데, 이곳이 그 오랜 세월 내왕이 금지되었던 북녘 땅이던가, 참으로 믿기지 않았다. 적십자주관으로 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도 부모와 형제를 이곳에 두고 그리움으로 애타 하는 실향민이 많다. 분단이라는 현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고성군 온정리-  아침공기는 맑고 쾌청하다. 짙어가는 녹음은 향기를 내뿜는다. 우리는 조반을 서둘러 먹고 비로봉 아래 있는 구룡폭포로 향했다.  

  “처음 버스에서 내려서 내 손으로 흙을 만져 보았어요.”

  “아, 그러셨군요.”

  일행 중에 팔순을 넘기셨다는 어른은 이곳이 고향이라 했다. 그분 얼굴에선 감회가 서렸다. 그 마음 밭이야 오죽하겠는가, 이 땅을 밟고도 그리던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수림대,  삼록수, 옥류담, 굽이굽이 비경을 감상하며 산을 오른 지 두 시간, 숨이 턱에 닿았다. 이윽고 구룡폭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환성을 질렀다.  계곡을 울리는 폭포소리와 웅장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그 물은 바위에 떨어져 다시 튀어 오르는데, 어찌나 영롱한지 마치 옥 같은 구슬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높이 74m 아래 못까지는 120m, 이 거대한 폭포는 우리나라 삼대 폭포에 든다하였다.  동해의 구룡(九龍)이 유점사 53불과 싸우다 패하여 이곳에 숨었다는 전설이 있다.  깎아 세운 것 같은 석벽(石壁), 그 끝자락에는 일곱 빛깔 무지개가 걸려있다.  자연이 만들어 내는 절승(絶勝) 앞에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서너 해 전이지 싶다. 덕수궁미술관에서 북한산수 전시회가 있었다.  어느 화가였는지 이름은 잊었지만, 힘차게 쏟아지는 구룡폭포 앞에서 망연히 서있었던 생각이 난다. 그림을 보며 가슴속까지 시원했던 그 느낌, 기억이 생생하다. 바로 이 장대한 폭포를 앞에 두고 화가는 붓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서화가의 붓끝을 떨리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뿐인가, 금강산을 유람하며 신산(神山)의 자태에 감흥 하여 시를 읊은 이가 어디 한둘인가.  그 유명한 ‘흙’의 이광수도 (金剛山 遊記) 한시를 지었다.

    구룡이 숨은 뒤로 소식이 끊겼으니,

    천지 풍운(天地風雲)이 일 없는 지 오래로다.

    구룡연 물결이 움직이니 기다릴까 하노라.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은 변할 줄을 모른다.  선조들의 발길이 닿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다. 구룡폭포의 절묘한 풍광명미(風光明媚)를 가슴에 담고 내려오는데, 목련관 앞에서 처녀아이가 말을 건넨다.

   “막걸리 한잔 맛 보시라요. 친구 분들 이래요?”

   함께 자란 동무들이라니까 반갑다며 생글 생글 웃는다. 열여덟 살쯤 되었을까, 얼굴은 잘 익은 사과 같았다.  우리는 조그만 탁상에 둘러앉았다. 두부안주에 한잔을 마셔보니 어릴 때 그 맛이라, 아버지 술 심부름하면서 한 모금씩 몰래 마셨던 농주 맛, 우리는 모처럼 추억 속을 거닐었다.  이곳은 분명 수십 년의 세월을 되돌려 놓고 있었다.  골마다 옥수가 흐르고 폐부 속까지 씻어줄 것 같은 맑은 공기, 공해 없는 하늘은 티 없이 고왔다. 양념이 적게 들어간 음식은 담백하여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있어 개운했다.

  구룡연 코스 곳곳을 설명 해주는 처녀안내원, 옥류관에서 냉면을 잘라주던 여성종업원,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에 아가씨들, 내가 만난 북쪽 여성들은 동글동글한 미인들이었다. 그것도 얼굴에 손을 대지 않은 천연 미인 말이다. 너도나도 성형이 난무 하는 시대에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삼일 째 되던 날, 만 가지 형상을 하고 있다는 만물상은 아쉽게도 안개에 묻혀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 다시 한 번 찾아오라고 남겨 놓은 거야. 가을에 오면 얼마나 아름답겠니.”

   아쉬워하는 나에게 친구는 말한다.  금강산 일 만 이 천봉, 이 기기묘묘한 산을 구경하려면 한 달이 걸린다 하였다.  삼일 동안 외금강 코스를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큰 기쁨이다.  우리는 훗날을 기약했다.  그때는 기차를 타고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귀가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 땅을 떠나며 못내 서운한 것은 민간인을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먼발치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꼬맹이와 그 아이 엄마로 보이는 젊은 아낙이 전부인데 초등학교 일학년쯤 되어 보였다.  초소마다 서 있는 청년들은 가무잡잡한 얼굴에 체격이 왜소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현실은 삶 자체가 궁핍해 보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과연 그 날은 언제일까. 

    “안녕히, 다시 오라요.” 확성기에서 여자인민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내 가슴 한쪽은 짠하게 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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