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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1.03 사랑, 주신만큼 그리움도 깊어라 by 물오리
  2. 2016.11.03 아름다운 눈물 by 물오리
  3. 2016.11.02 오늘도 당신 꺼 예요. by 물오리
  4. 2015.08.17 숲 속 마을 by 물오리
  5. 2014.08.28 인심(仁心 ) - 시골 풍경 - by 물오리
  6. 2013.11.30 그럴 수도 있지 뭐 by 물오리
  7. 2013.08.06 사랑, 그것은 기쁨 by 물오리
  8. 2013.07.21 오십 대는 새댁 -인생 하프타임- by 물오리
  9. 2013.07.17 말 말 말 by 물오리
  10. 2013.06.21 노약자석과 스마트폰 by 물오리

                 


      

    수필동인지 ‘사계’가 10번째의 책을 내놓았다.

    선생님을 모시고 삼십여 명의 문우들은 타원형 식탁에 둘러앉았다. ‘사계, 출판기념회’ 현수막이 병풍 위에 걸려있고 원탁에는 꽃이 한 아름 담긴 꽃바구니가 놓여있다.

    해마다 책이 나올 때마다 마련되는 자리지만, 그해 행사는 나에게 특별한 자리었다. 수필공부를 시작한 지 4년, 그 봄에 나는 수필가로 등단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기쁨이었다.

   막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 고향에서 작품 활동을 하시는 반숙자 선배님은 글공부를 시작하라고 두툼한 원고지와 볼펜 한 다스를 보내왔다. ‘가슴속이야기를 써 보세요.’라는 말과 ‘수필의 세계’ 임선희 선생님을 찾아가라는 메모가 함께 있었다. 나는 그 격려에 힘을 얻어 미뤄왔던 공부를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은 생업으로 하는 일을 한나절 접고 수필 반을 찾았다.

   선생님의 첫인상은 날씬한 체격에 투피스를 입은 멋쟁이셨다. 목소리 또한 보통사람들 보다는 두 옥타브쯤 높아서, 상큼함과 함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귀에 쏙 들어왔다. 수필공부를 왜 하려 하는지,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내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고 싶어서’라고 말을 했던 생각이 난다. 그 후, 삽 십여 명의 수강생들과 글공부가 시작되었고 네 번이나 해가 바뀌고 나서 나는 등단과 함께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축배의 잔을 들었다.

“밤새워 쓴 글이 크게 칭찬을 받았을 때, 마약처럼 전신으로 번지는 기쁨을 누가 모른다 하겠는가, 창가에 떨어지는 작은 새소리를 듣고 찰나를 통과하는 빛의 움직임을 느낄 때 우리는 문학을 만납니다.”

   선생님의 간단한 축사 말씀이다. 이어 글을 쓰면서 달라진 것들과 느낀 점을 돌아가며 말했다. ‘생활의 변화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 나태해질 때마다 힘이 되었다.’ ‘ 나이를 아름답게 먹어 가면서 살 수가 있을 것 같다.’ 저마다의 소감을 이야기했고 다음은 내 차례가 되었다.

  “등단 후, 이름도 없고 미미한 글쟁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독자였어요. 제 이름을 확인하더니 동인지‘사계’에 실린 글을 보고 전화를 했노라 하면서, 제가 쓴 글을 감동으로 읽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라 어리둥절했지만, 너무 기뻤습니다. 모두 선생님 은덕입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그날 ‘사계’ 가족은 모두 기쁨으로 충만했었다. 나 또한 그날의 행사를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생업에 종사하며 나는 오랜 기간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강의는 늘 주제가 달랐다. 미술, 음악, 세계명작, 그리고 처음으로 문학을 지향했던 구인회(九人會)부터 현대문학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성향과 대표작을 공부했고 그 외도 많은 것을 섭렵해 주셨다. 뿐만이 아니라 수강생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특성을 파악해 장단점을 꼭 집어 주셨다. 연세가 좀 있으셨는데도 강의하실 때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즐겨 입으시는 스타일은 슈트였는데, 모자부터 구두까지 색상을 맞추어 입으셨다. 선생님은 귀족적인 멋쟁이셨다.

   2006년 가을, 종강하는 날까지 나는 운 좋게도 선생님을 모시고 다닐 기회가 많았다. 그것은 선생님 댁과 우리 집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이런저런 사담으로 이어졌는데, 주로 내가 사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주셨다. 아이들 키우느라 힘들었던 시절, 그 팍팍함까지도 귀 기울여 주셨던 것이다.

  “남순자씨는 사막에 데려다 놓아도 살아갈 사람이야, 딸 셋을 열심히 키웠으니 말년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

   선생님 그 말씀대로 지금 나는 딸들 덕에 그러저러 편히 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께 글공부만 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안목과 세상을 반듯하게 바라보는 눈을 주셨고, 삶이란 바다에서 조금은 생각할 줄 아는 지혜를 가르쳐 주셨다. 농촌에서 올라와 무지했던 내 영혼을 칼 같은 감성으로 깨워 주신 분이 선생님이시다. 내 인생에서 선생님을 만난 것은 정말로 큰 행운이었다.

   25년이란 긴 세월 동안 많은 수필가를 배출한 선생님은, 건강문제로 마지막 수업을 하게 되었다.

“많은 제자를 가르쳤고 나름대로 성의를 다 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동인지 ‘사계’를 추억하지 않고 살겠는가, 또한 누군가 나를 생각해주는 일은 마음 따뜻한 일이다. 앞으로 여러분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이 시대의 귀족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라고 끝인사를 하셨다.

   당신이 품위 있는 귀족이셨기에, 우리 모두에게 그러기를 바라셨나 보다. 찬바람이 분다. 정신이 퍼뜩 날만큼 싸늘한 날씨, 이월의 산을 오르다 문득 하늘을 올려본다. 이 상큼한 날씨를 좋아하셨고 클래식을 사랑하셨던 선생님, 그 큰 사랑, 주신만큼 그리움도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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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

아름다운 눈물

수필[Essay] 2016. 11. 3. 04:42

 

    봄을 안고 있는 이월이다.

    나는 오늘 박사 학위를 받는 시상식에 초대되어 가는 길이다. ‘앰버서더 호텔’이 층 연회장에는 축하메시지가 걸려있다.

   <명예경영학박사 학위수여식> 단상 위에 걸려있는 플래카드 아래 주인공의 함자가 보인다. 홀에는 기업인들과 축하객으로 가득하다. 왼쪽 벽면에 걸린 화면에는 회사와 공장 내부, 그리고 가족사가 영상에 나왔다. 잠시 후, 학위 수여식은 시작되고 내빈 인사에 이어 연혁(沿革)보고와 함께 학위수혜자 프로필을 소개한다.

   열다섯 살 소년이 기계공으로 출발하여, 기업인으로 꿈을 이루게 된 역사가 차례대로 소개되었다. 한국 전쟁을 겪고 기아산업 기공 부에 입사하여 일급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1970년도에는 금속부문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국 정밀도 경진대회에서 최우수 금상을 두 번이나 연속 받았다고 한다.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주) ‘효진오토테크’는 삼십 여년 자동차 국산화를 위해 매진해온 대표적인 회사다. 국산자동차 개발과 차체를 검사하는 로봇시스템을 개발하여, 대한민국 최우수업체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기술혁신 우수기업 부문에서도 경영인상을 받았으며, 현재 자회사가 개발한 검구기기를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유럽까지 수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2008년도에는 ‘천만 불 수출 탑’ 훈장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공적이 미국 버나덴 대학(Univ.대학)에서 주관하는 경영학박사 심의(審議)를 통과하여, 오늘 이 영광스런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오늘의 주식회사 ‘효진’은 인재육성재단에, 미래 장학회에, 소외계층을 위해 소리 없이 후원을 하고 있는 기업이다.

   이윽고 박사 모(博士帽)가 그분 머리 위에 씌워지고 축하객들은 기립 박수를 쳤다. 이내 내빈들의 축사로 이어졌는데, 많은 세월 동안 오늘의 주인공을 보며 변함없는 성실성과 근면함에 입을 모았다. 그리고 그동안 이루어낸 업적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서고 보니 지나온 시간이 생각나 목이 멥니다.”

주인공의 인사말이다. 진정하려는 듯, 물 한 모금을 마시는 그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남자의 눈물, 그 순간의 눈물은 의미 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객석에 앉은 내빈들과 나는 이 엄숙한 순간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에 어리는 눈물이라 해도 거기에는 천근만근의 무게가 있고, 긴긴 세월을 지탱해온 깊은 역사가 서려 있지 않겠는가, 오랜 세월 동호인으로 함께 했건만, 오늘은 그분의 또 다른 면모를 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느낀다. 이 자리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나 역시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박사학위 수여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42년 전, 갓 제대한 장병을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팔십이 넘으신 원로 한 분을 소개한다. 군 복무를 마치고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상사로 계셨던 분이라고 했다. 스물여섯 살 청년의 착실함이 한눈에 보였으리라, 노장은 빙그레 웃고 계셨다.

   오늘의 주인공은 우리 지역 배드민턴 연합회 회장님이다. 수년간 삼성산 시흥계곡에 체육의 장을 만들어, 동호인들과 지역주민은 그 운동장에서 건강을 다지고 있다. 성품이 소탈하고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히려 그 일을 즐겁게 해내고야 마는 분, 그래서 별명도 작은 거인(巨人)이다.

     어느 해인가, 운동장 확장공사를 할 때였다. 계곡도랑에 뚜껑을 덮고 사각의 코트 장을 만들기 위해, 백여 명의 회원들은 괭이와 삽질을 했다. 돌을 고이고 둔덕을 쌓았다. 그리고 회원들이 하는 게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긴 의자를 곳곳에 설치하는 등, 참으로 큰 공사였다.

   모든 일에 회장님은 선두주자였다. 회원들은 각자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열심히 동참을 했고, 다섯 개의 코트 장이 열 개의 코트 장으로 늘어났을 때, 회원들은 쾌적한 환경을 환호했다. 맑은 물이 흐르고, 철 따라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이 숲 속 운동장은,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회장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완공을 앞두고 마무리로 접어들 무렵, 계절은 이른 봄에서 한여름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36도를 웃도는 뙤약볕에 밀짚모자를 쓰고 회장님은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며칠 후, 온몸에 땀띠가 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어떤 일이든 언제나 몸소 실천하는 분이다.

   객석에 앉은 내빈과 회원들은 축하의 잔을 들었다. 그리고 흐뭇한 정경(情景) 속에 행사는 끝이 났다. 주변 사람이 행복해지면 기쁨은 나누어지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집념과 성공을 지켜보면서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인생이 고해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듯 영광의 날이 있어 삶은 귀한 것,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면서 나는 한 시간 전에 그 장면을 몇 번이나 회상했다.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감동은 여운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인생이란 말속에는 갓 가지 눈물이 있겠지만, 오늘같이 아름다운 눈물이 있어 삶 또한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아마도 사는 날까지 일하느라 손에 장갑을 끼고 있을 것이다.”

  오늘 박사님이 되신 주인공의 끝인사말에는 삶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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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


  

  아침공기가 청량(淸涼)하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맞는 가을 아침이다시흥2동에 있는 호압사(虎壓寺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이십 여분 올라가면잣나무 숲이 나온다간간이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 널찍한 평상도 있어나는 이곳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요즘은 다람쥐보다는 청설모가 쉽게 눈에 띈다평상에 앉아 쉬고 있는데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잣송이다반쯤은 까먹고 반쯤은 남아 있다얼른 주워 보니  향이 대단하다헌데 언제 왔는지 청설모  마리가  주위를 돌다가 까만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먹다가 떨어트린 녀석인 모양인데 좀처럼 물러날 기세가 아니다향기가 좋아 갖고 갈까 했는데마치 내놓으라는  끈질기게 나를 보고 있다.  

  너는  따서 먹어라. 분명하게 말을 했는데도 통하지 않는다어쩔  없이 열매가 떨어진  자리에 도로 놓으니 잽싸게 물고 나무 위로 올라간다

   

   아침햇살과 안개가 만나는  숲의 풍경은 청아하기 그지없다풀잎에 매달린 이슬과 깨어나는 숲을 보고 있노라면  전에 감동으로 읽은  속의 ()교수 모리 생각난다서너  유학차 미국에 있던 막내가 추석이라고 보내온 상자에는선물과 함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이 들어있었다.  

   모리 슈워츠그는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는 대학교수였다.  1994 루게릭병을 얻어 더는 강의를   없을 제자 미치와의 재회로 이야기는 전개된다비록 몸은 굳어 갔지만마음만은 여전히 건강했던 교수 모리는삶의 진정한 의미와 죽음을 맞는 과정을 열정적으로 들려준다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자기를 둘러싼 지역사회를 위해그리고 자기에게 목적과 의미를 주는 일에 자신을 바치라고 제자 미치에게 말한다

   미치 모리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그리고 병이 깊어져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스승님에게 미치 묻는다

  24시간만 건강해 진다면요?  

  산책을 하겠네나무가 있는 숲으로 가서여러 가지 나무도 보고 새도 구경하면서오랫동안 보지 못한 자연에 파묻히겠네. 

   하고 싶다는 일이  가지  있었지만()교수 모리 숲을 그리워했다책을 읽은  여러  되었지만나는  속을 거닐 때면 모리 슈워츠 생각난다그리고 별생각 없이 보내는 하루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하루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지금을 소중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현재의 내가 과거와 미래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고과거를 생각하면 후회뿐이지요지금오늘이 중요합니다. 불국사 성타스님의 법어가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인데도 우리는 때때로 잊고 산다그러므로 어제도내일도 아닌오늘을 참으로 소중하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능선을 돌아 하산하는 길에는 FM 라디오 음악방송을 듣는다오늘따라 진행자가  맘과  같은 끝인사를 한다.  

  청명한 가을 날씨입니다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세요오늘도 당신  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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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

숲 속 마을

수필[Essay] 2015. 8. 17. 11:47

  감나무 와 느티나무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계단 옆에는 우람한 호두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실히 이십여 년이 넘었다고 하니, 사람으로 치면 간난 아기가 청년이 된 셈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이 손바닥만 한 잎 사이로 영글어가는 호두를 주렁주렁 달고 있어 오가며 나는 자주 올려다본다.  작년 가을, 옆집 아우님이 호두 세 개를 맛보라며 내 손에 쥐여주었다. 어찌나 야물 지게 여물었는지 속이 꽉 차 있었다. 그때 이 큰 나무가 호두나무라는 것을 알았다.

 

    지지난해 봄,  한내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나이 탓이겠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이 번거로워 출입이 편한 일 층을 택했다. 우선 봄이 되니 코앞에서 새빨간 앵두가 인사를 했다. 매화꽃 향기가 봄내 나를 취하게 하더니 매실도 달렸다. 뿐만이 아니라 맞은편 갓길에는 제법 큰 살구나무가 있어 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유년 시절 시골집에 있던 살구나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봄꽃이 지고 나니 과실들은 제 색깔을 내며 익어갔다.

 

"살구 주우시네요."

"설탕 넣고 버무려 두었다가 두어 달 후에 먹으면 참 맛나요. 가져다 한번 해 봐요 "

  

   연세가 팔십쯤 되어 보이는 안노인 말씀이다. 샛노랗게 익은 살구는 아기 볼살처럼 결이 고왔다. 깨끗하게 씻어 소주와 식초를 넣은 물에 댓 시간 담갔다가 건져냈다. 조금은 술도 담았다. 두어 달 지나 며칠 전에 맛을 보니 향이 대단하다. 그래도 과일주 아닌가. 앵두 잼도 만들어 보고, 실한 매실을 따서 매실청도 담았는데 백일이 지나야 한다니 맛이 어떨지 기대가 된다. 이곳 와서 과실 따는 재미, 효소 담는 재미, 많은 양은 아니지만 뜻밖에 호사를 누린다. 입추가 지나고 내가 눈독을 들이는 것은 가지가 휘도록 달린 대추와 감이다. 헌데 감은 건드리지도 말라는 옆집 아우님 말이다. 사연인즉슨 복도 끝 집 안주인이 입주 당시 감나무를 심은 장본인이란다. 어느 사람도 손을 대지 못하게 엄포를 놓은 것 같은데, 문제는 그 감나무가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다는 거다 .

 

   이른 아침,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붉게 익어가는 사과도 보이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모과도 보인다. 아파트 안에 있는 과실이라 어떨까 찜찜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농장인들 소독하지 않고 과실나무를 키우겠는가, 관상용으로 심었겠지만 생각보다 튼실하고 예쁘다.

아무래도 이곳은 사람이 살기 좋은 점을 특별히 고려해 설계한 기획도시 같다. 숲이 우거진 것도 그렇고 동마다 창문이 남향이다. 누가 조성을 했는지 지금의 이 환경이 고맙기만 하다.

 

   이 동네는 양산이 필요 없다. 길을 따라 자란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어쩌다 외출했다가 들어 올 때면, 마치 시골 숲 속 마을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나무가 많으니 새들도 많아 새벽이면 그들의 노랫소리에 잠이 깬다. 내가 알아보는 새는 유감스럽게도 참새보다 크고 까치보다 작은 박새다.

   유난히도 더운 올여름,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있으면 솔솔 부는 바람 덕분에 더위가 사라졌다. 나는 이곳에서 FM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다만 가끔은 오래된 관을 교체하느라 소음으로 시끄러운 날도 있지만 크게 성가시진 않다.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열대야, 도시의 열섬현상이 날로 문제란다. 해결책은 도심녹화라고 하는데, 이 동네는 숲이 주는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칠월 말쯤 녹색연합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스팔트와 숲 속 지면 온도 차이는 무려 두 배 이상 난다고 보도했다.  또한, 한 낯의 열기를 줄이고자 옥상 정원을 만드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해마다 열리는 과실들과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상쾌한 공기를 내어주는 키 큰 나무들, 푸른 잎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인다. 문득 요즘 읽고 있는 성경 말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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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

 

 

 

둘째 딸애가 물 맑고 공기 좋다는 양평으로 이사를 했다.

지난해 뜻밖에 발병으로 큰 수술을 받고, 사위랑 손자 손녀, 가족 모두 그곳으로 옮겨갔다.

북한강을 끼고 찾아가는 길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상스키를 즐기는 사람이 보이고,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젊음도 보였다. 여름은 싱싱하게 펼쳐있었다.

 

육십 중반으로 보이는 집주인 부부는 늘 웃었다. 자녀 둘은 외지에 살고 노부모를 모시고 네 식구가 단출 하게 살고 있었다. 넓은 텃밭에는 갓 가지 푸성귀가 보이고 주변에는 자두, 복숭아, 호두, 대추, 오디와 비슷한 블랙베리가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었다.

이른 새벽, 뒷밭으로 산책하러갔는데 능선에 걸린 안개가 그림을 그린다. 간밤에는 소쩍새가 울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리인지, 마치 고향 품에 안긴 느낌이었다.

벼가 실하게 자라는 논을 지나 산나리가 핀 오솔길을 돌고 오니 툇마루에 강낭콩 한 바가지와 호두 한 바가지가 놓여있었다. 콩은 밥에 넣어 먹고 호두는 지난가을에 수확한 것이라며 주인댁이 가져다 놓은 거였다.

 

무공해 깻잎을 간장에 조려온 반찬은 담백해서 맛났다. 가지 무침, 비름나물, 오이 무침, 딸은 내가 해 주는 찬보다 주인댁이 주는 반찬을 더 잘 먹었다. 뿐만이 아니라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푸성귀를 맘 편히 먹으란다. 감자며 고추 당근 토마토, 감사하는 마음으로 따서 먹었다.

작물을 가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세대는 잘 알고 있기에 고마운 마음이 컸다. 늘 웃는 인상처럼 마음 또한 넉넉한 분들이었다.

 

새로 지은 황토 집은 향기가 좋았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찬물이 나와야하는 변기 물받이에 뜨거운 물이 나왔다. 시공했던 기술자가 막걸리 한 잔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선을 바꾸어 설치를 했단다. 벽을 뜯어내고 다시 바르고 수리를 했다. 시공자에게 뭐라고 한마디 할 수도 있으련만 주인 부부는 웃으며‘고쳐 쓰면 되지요’했다.

세상일에 화 낼 일이 없다. 그리고 급할 것도 없다. 각박하게 돌아가는 도시 생활에서 잊고 살았던 풍경이다. 나라 안은 크고 작은 사건이 연일 터지고 있지만, 이곳은 땅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고 베풀며 넉넉하게 산다.

 

조석으로 담소하며 산책하는 그들 부부를 본다.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주인댁 부부가 움츠러진 내 마음마저 훈훈하게 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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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

인사하는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른다.

나도 웃으며 그를 따라 거수경례를 한다. 우리 동네 삼성산 시흥계곡에 있는 배드민턴구장의 아침풍경이다. 어제 내린 눈으로 산은 눈꽃이 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겨울의 절경(絶景)이다. 까치는 이 눈 속에 무엇을 먹고 사는지 눈가루를 뿌리며 둥지위로 날아든다. 넓은 천막이 처진 이곳은 벌써 장작이 활활 타고 있다. 일찍 나온 회원이 난로에 불을 지펴 주전자에선 물이 끓고 있다. 커피나 혹은 쑥 차를 마시며 이야기가 한참이다.

이곳 회원이 된 것이 십여 년 전일이다. 작은 키에 통통한 몸무게는 여러 가지 증상을 몰고 왔다. 누우면 숨이 찼고 관절이 시큰거렸다. 집요한 편두통도 찾아왔다. ‘아무래도 운동을 해야겠구나.’ 나는 작심을 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혹은 약수터에서 배드민턴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시작을 했다. 공을 능숙하게 다루는 선배들이 코치해 주었다. 라켓을 잡는 법과 공을 다루는 방법, 그리고 난타를 쳐주었다. 멀리 보내는 하이 클리어, 네트를 살짝 넘기는 헤어핀 크로스, 열심히 하는 데도 공을 자주 놓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깨에 힘을 빼고 손목으로 쳐야 하는 데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해가 바뀌면서 나는 게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남녀가 짝을 지어 하는 혼합복식 게임이 있고 같은 성(姓)끼리 짝을 지어 하는 복식게임이 있다. 셔틀콕을 칠 때의 묘미는 찬스 볼이 왔을 때, 빈자리에 꽂아 버리는 스매싱이다. 그 외도 길게 보내고 짧게 넘기고 게임이 시작되면 숨차게 뛰어야 한다. 상대 팀이 우리 페이스에 말려들면 승리는 눈에 보인다. 이론에는 나도 도사다. 그러나 생각대로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내가 받아야 할 공을 놓치고 파트너가 쳐야 할 공을 터치해서 미안해 웃는다.

일 년에 한 번 대회가 열리는데 지난 가을이었다. 8개의 클럽에서 나온 선수가 300여 명, 그날은 동호인들의 잔치였다. ‘사회인 배드민턴 대회’ 상수리나무에 걸어놓은 현수막처럼 남녀노소 함께 어울리는 자리다. 시합은 시작되었고 나는 삼승까지 가서 간신히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것도 파트너 덕분이었다.

“여사님, 은메달 축하해요.”

“예, 감사합니다.”

대답은 그리했지만 좀 민망했다. 사실 나와 같은 무렵 입회한 회원들은 금메달을 목에 건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난히 운동 신경이 둔했다. 어린 시절 운동회 때, 그 흔한 연필과 노트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도 꼴찌만 면할 뿐, 그래서 늘 아쉬움만 남아있었다.

 

첫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처음으로 열리는 운동회였다. 새벽잠을 설쳐가며 김밥을 싸고 밤도 삶고 점심을 서둘러 장만을 했다. 딸아이의 달리기경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본부석 옆에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저학년 달리기는 처음 순서로 펼쳐지는 매스게임이 끝나고 바로 이어졌다. 드디어 딸아이 반이 달렸다. 출발신호가 울렸는데 웬일인지 딸애가 보이질 않았다. 앞에서 달려온 아이들은 골인했고 출발지점을 살펴보니, 두리번거리며 세상구경 다 하고 꼴찌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모전여전이라더니 엄마보다 더하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집 딸이 꼴찌로 들어오더라고.”

“세상 구경하느라고 그럴 수도 있지 뭐”

옆집 엄마 말에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나는 민망해 또 웃었다.

 

“남 여사가 12년 만에 은메달을 땄지 아마”

“예, 맞습니다.”

80을 넘기신 노장은 내 운동 실력을 알고 있는 터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이 어린 후배가 그런 말을 했다면 뭐라고 한마디 했을 터인데 둔해서 그런 것을 인정할 수밖에. 남들은 날렵하게 잘도 하는데 타고난 것이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체중도 줄고 숨찬 증세도 없어져 지하철역 계단도 문제없다. 그뿐만이 아니라 서너 게임을 하다 보면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단박에 사라진다. 그리고 이제는 봄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사계에 묻혀 산다.

산에서 내려오며 길동무에게 한 말이다.

“내가 둔하긴 하지, 좀 부끄럽더라고”

“괜찮아, 메달 좀 늦게 따면 어때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긴 인생을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자신을 위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또 한 번 나를 위로하며 깍깍대는 까치의 인사를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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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딸과 사위

 

 

 

‘수 정교’ 다릿목을 지나면 긴 둑길이 나온다.

노란 달맞이꽃이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실바람에 박하향이 묻어온다. 소나기가 시원하게 퍼붓고 간 저녁, 풀숲엔 반딧불이 반짝인다. 입대한 그가 첫 번째 휴가를 온 날이다. 그의 손엔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 하였던가, 눈 감으면 어제 일처럼 선연한데 세월은 아득히도 나를 데려다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늦게 귀가한 딸들이 아무 데나 던져버린 꽃다발이 눈에 띈다. 고운 색으로 물든 한지에 빨간 장미 한 송이, 하얀 안개꽃에 노란 프리지아, 그리고 연보라 튤립에 예쁜 리본이 매여 신장 위에도 식탁 위에도 놓여있다.

“좋은 때다. 내게도 가슴 설레던 시절이 있었지”

나도 모르게 주절거리며 꽃병을 찾는다. 어느 해인가 딸애가 내놓은 사진 속에는 몸집이 가냘프고 키만 밀대같이 큰 사내아이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이 몸으로 처자식 건사하겠니?”

  대수롭지 않게 대꾸를 했는데 삼 년쯤 지났을까 느닷없이 인사를 왔다. 그동안 학교를 마치고 군 복무 중이란다. 짙은 눈썹에 적당한 콧날, 이목구비가 수려하다. 사진과는 달리 체격도 늠름하고 당당하지 않은가. 뉘 집 아들인지 볼수록 잘 생겼다.

“안녕하십니까?”

  건장한 체격에 얼룩무늬 군복이 한결 믿음직해 보인다. 웃음 짓는 얼굴에는 선량함이 엿보이고 어찌 된 일인가 낯설지가 않다. 딸 중에 유난스럽게 까탈스러워 적이 걱정을 했던 터에, 진중하고 심덕(心德) 있어 보이는 상대가 생기다니 딸만 키운 나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꽃다발은 몇 번이나 안겨주었고 어떤 묘법을 썼는지, 마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아니하다.

“어머니, 혜원이를 사랑합니다.”

 그래, 사랑이란 말처럼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 또 있을까, 카키색의 젊음 앞에서 주책없이 나는 지난날의 내 사랑을 회상한다. 더없이 지순하고 청명했던 시절, 반딧불이 불을 밝혀 주고 달맞이꽃이 피던 밤, 나는 그 밤을 잊지 못한다. 온 세상 모두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고 했던 그, 그 환희(歡喜)의 얼굴을 다시 보고 있다. 그것은 기쁨 그 자체였다. 사랑만이 창조할 수 있는 순수의 얼굴이다. 딸아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이해하고 감싸줄 것 같은 넉넉함이 청년의 온몸에서 배어 나온다.

 

   태어남(生) 이란 얼마나 큰 기쁨인가, 하물며 수많은 사람 중에 인연이 되어 사랑함에야 더한 축복이 있겠는가, 지나간 시간 속에 담겨있는 기쁨의 조각들은 내 마음의 보석이 되어 언제나 나를 미소 짓게 한다. 흔히 사랑은 콩깍지가 씌워야 하고 결혼은 한쪽 눈을 감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사랑 없이 우리네 삶이 어찌 이어질 수 있을까, 아끼고 다독이고 상대를 위한 끊임없는 배려로 우리는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다. 그것은 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소유하는 일이리라.

며칠 전, 커다란 꽃바구니가 배달되었다. 핑크빛 카네이션에 하얀 백합, 그리고 빨간 장미가 소담스럽게 담겨 있었다.

‘어머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카드 속에 쓰인 글이다. 혼자 중얼거린 소리가 건너갔지 싶은데, 그래도 얼마 만에 받아보는 꽃인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요즘 내가 새삼 느끼는 것은, 딸에 대한 나의 사랑도 사랑이려니와 딸을 사랑하는 한 남자가 나에게 베푸는 애정 또한 소중한 기쁨임을 알게 되었다.

‘많이 사랑하고 예쁘게 살아다오.’

도란도란 귀엣말하며 나란히 나서는 모습을 보며 새롭게 얻은 또 하나의 사랑을 확인한다.

  미국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여주인공 프란체스카는 딸에게 “인생은 더없이 아름다웠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이 대사를 조금 더 풀이해서 말해 줄 것이다. “인생이 기쁜 것은 사랑 때문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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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여 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아껴주시던 스승님께 안부전화를 드리니 내 나이를 물으셨다.

  “저도 육십이 다 되어 가는데요.”

  “그래, 아직은 새댁이네.”

   갑자기 하시는 말씀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 나이가 무슨 새댁? 괜한 말씀을 하시네.’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십 년,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이렇다 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는데 세월은 백 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지나가고 나는 육십 대 끄트머리에 와 있다. 나이란 놈은 많이 먹을수록 가속도가 붙는다고 하더니 괜한 말은 아닌 듯싶다.

 

  우리 반 기타 선생님은 이십 대 후반이다. 얼굴도 미남이지만 적당한 체격에 속 깊은 마음까지, 요즘 젊은 사람과는 달리 넉넉한 품성이 보인다. 기타를 배우는 회원이 실버들이라 익히는 속도가 느려 답답할 텐데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자상하게 지도한다. 뉘 집 아들인지 고맙기도 하고 기특한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 나이를 물어보았다.

“아, 어머니요, 오십 대 후반이신데요.”

“어머나! 그래요, 어머니가 새댁이네”

  젊은 선생님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 새댁이라는 말이 생경해서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만큼 나이에 수를 더하고 보니, 내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 절로 수긍이 된다.

 

  여자 오십 대는 새댁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낙의 인생에서 또 다른 일을 생각해볼 수 있는 하프타임이다.

  아이를 낳고 가족을 위해 보냈던 일상에서 조금씩은 놓여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시기가 오십 대다. 무엇보다도 제2의 인생을 계획하기엔 더없이 좋은 때이다. 본인이 좋아하는 취미를 살려 전문가도 될 수 있고, 못 이룬 꿈을 향해 다시 공부해 볼 수도 있는 나이, 백세를 바라보는 이 시대에 인생 이모작을 계획하기에는 더없이 적절한 나이다.

   산을 타는 동호인 중에 남도소리를 잘 부르는 친구가 있었다. 노랫가락, 성주풀이, 선 시조까지 부지런히 배우러 다니더니, 지금은 강사가 되어 문화센터에서 제자들을 가르친다.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같은 연배 제자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산다.

 

  나 역시 오십 대에 글공부를 시작했다. 막내가 입시공부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 미루었던 공부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일을 접고 집을 나설 때는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기쁘기도 했고 생활에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그때 만난 문우들과 글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분에 넘쳐 고맙다. 그뿐만이 아니라 독서지도 수료증을 따고 초등생 책 읽기 지도를 할 때는 나름 보람도 컸다. 어느 분야든 삼 년을 배우면 귀가 열리고 빠르면 오 년, 늦어도 십 년이면 그 일에서 전문가가 되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요즘은 자기 관리를 잘하는 시대여서 그런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주름살도 없고 젊기만 한 오십 대, 그들을 보면 나도 ‘아직은 새댁이네!’ 하는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온다.

 

   이른 아침, 계속되는 장맛비가 조금 멈추었다. 인근에 있는 구름산으로 산책하러 나갔는데 빗방울이 또 떨어진다. 산 중턱에 있는 정자 안으로 들어섰는데, 팔순을 넘긴 어른 두 분이 나를 보더니 불현듯 나이를 묻는다.

“육십 끝자락인데요.”

“그 나이만 됐어도 좋겠네.”하며 웃으신다. 하긴 십 년 후에 나도 그 말을 또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아직은 새댁이네!’ 라는 말을 들었던 그 오십 대가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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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말 말

수필[Essay] 2013. 7. 17. 20:23

 

 

 

  아침 7시, 나는 헤드폰을 귀에 걸고 인접해 있는 계곡으로 간다. 이 시간에 방송되는 라디오에는 ‘말 말 말’이란 코너가 있는데 각계각층의 사건들을 유머러스하게 전해 준다. 실감 나는 것은 성우가 성대모사까지 해 주어서 듣는 이가 재미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유난히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눈에 띈다. 산을 오가며 자주 만나는 분인데, 고령의 어른이시다. 이 어른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상대가 흥미 있어 하는지 없어 하는지 아랑곳없다. 그럴 땐 상황을 봐가며 슬며시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다.

 

오늘도 잣나무가 있는 숲까지 갔다 내려오는 길인데, 산그늘에서 몇 분이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계셨다. 그분의 긴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 목이 타셨는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는데, 아뿔싸! 그 잔에 벌 한 마리가 들어간 것이다. 넘어가면서 목구멍을 쏜 것이다. 급기야 신음을 내며 쓰러지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얼굴은 붉게 부어올랐다. 다행히 구급차가 도착해서 병원으로 직행했다.

 

말이 많은 것도 공해다. 각자 바쁜 일상, 여간해서 느긋하게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겠는가.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대화를 구사(驅使)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 같다. 구급차가 사라지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간관계로 해서 늘 쓰이는 말(言), 이 말이란 무엇일까. 새롭게 화두가 되어 머리에서 맴돈다. 그리고 오래전에 말 때문에 절교를 한 친구들이 생각났다. 다들 막내의 입시를 앞둔 겨울이었다.

“네 딸이 지방 대 00 갔다며 ?”

한 친구의 이 한마디가 화근이 되었다. 아이가 몸이 아파서 학교를 쉬었고, 그 바람에 지방대 분교를 가게 되어 속이 타고 있던 터에, 한 친구가 생각 없이 던진 말이 비수처럼 꽂힌 것이다. 성적도 좋은 아이였는데 몸이 아팠으니 친구의 안타까움이야 오죽했겠는가.

 

살다 보면 마음 아픈 일이 종종 생긴다. 위로는 못할망정 아픈 곳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결과라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말이란 달콤하고 감미로운 언어도 있지만, 동시에 칼날같이 예리하여 마음을 벨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다. 생각 없이 한 말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진심으로 사과해야 함은 물론이고, 시기를 놓쳐버리면 그 실수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젊은 날 아이를 키우며 시집살이할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았다. 시어머님이 남다르게 사랑이 많은 분이셨기에 더욱 어려움을 몰랐던 것 같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사니, 나 하나 참으면 집안이 편한 법이란다.”

어느 날 어머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다. 얼마나 보시기에 민망하셨으면 그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하면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다.

 

유능한 앵커이며 말하기 전문가 ‘바바라 월터스’가 쓴 <당신도 말을 잘할 수 있다> 라는 책을 보면 몇 가지 요령을 언급했다.

‘나 중심의 생각을 벗어나 상대방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것이 말을 잘하는 첫 번째의 기법이다. 예의 바른 태도, 사려 깊은 행동, 올바른 언어 선택, 웃음을 자아내게 한 이야기는 결코 버리지 않았다.’ 라고 했다. 그리고 때로는 침묵도 필요했다고 강조한다.

정중한 어법으로 매너 좋은 말솜씨,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비단같이 고운 말은 사람의 마음을 토닥여 주고, 부드러운 말은 가슴을 따듯하게 한다. 만나는 모임을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하고, 전화를 걸기에 앞서 상대가 기분 좋아할 말을 궁리하신다는 나의 스승님, 그분의 말속에는 유쾌하고 배우는 것이 있었고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함이 배어있었다. 세상을 부드럽게 살아가려면 적어도 이 정도 센스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문이 닫히지 않은 집과 같다.’ 라는 탈무드의 격언처럼 선현들의 가르침을 새겨 말을 아낄 줄 알고 적절히 하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 같다.

말을 잘한다는 것. 그것은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고 나아가서 함께한 그 시간이 유익하고 즐거웠다면 그 사람은 최고의 화자(話者)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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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면 나도 모르게 노약자석 부터 살피게 된다.

지지난해 간단한 무릎수술을 받고 생긴 버릇이다. 헌데 어김없이 젊은 청년이나 여학생이 앉아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있다. 뒷좌석이 비어 있는데도 말이다. 그럴 때 나는 그들에게 속삭인다.

“ 저기요, 무릎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자리 양보 좀 해 줄래요.”

“ 아! 예 "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내 자리를 내어주는 청년도 있고, 간혹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좌석을 내어 주는 여학생도 있다. 나는 ‘고맙습니다.’ 아니면 ‘고마워요.’ 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버스는 무릎이 성치 않은 승객을 위해 기다려주질 않는다. <노약자석>은 노인이나 몸이 약한 사람을 위한 전용좌석이다. 그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앉는 걸까. 아마도 별생각 없이 가까우니 편해서 앉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어쩌다 볼일이 있어 외출을 하게 되면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은 가급적 피한다. 하루 일을 시작하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 가 봐서이다. 스킨이나 로션 향을 풍기며 정갈한 차림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보면, 지나간 시간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 짖는다.

가끔은 세월이 단숨에 가버린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그리고 어느새 노약자석을 찾는 자신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누군들 열심히 살지 않았을 까만 일하고 자식 키우고 나니 어느덧 노년에 접어들었다. 마음 같아선 젊은이들에게 노약자 좌석은 비워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대부분 뒷좌석은 비어 있으니 말이다.

며칠 전 버스를 탔는데 얼굴도 잘 생긴 젊은이가 나를 보더니 이내 자리를 내어주고 뒷좌석으로 간다. 나는 또 ‘고마워요.’ 인사를 했다. 그날은 기분이 좋았다.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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