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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05 홍콩여행 - 우리나라 좋은 나라 - by 물오리
  2. 2017.04.27 꽃길 따라 페달을 밟는다. by 물오리 5
  3. 2017.04.22 카페 플로라 by 물오리
  4. 2017.04.16 사랑한다는 말 by 물오리
  5. 2017.04.05 개나리 꽃필 무렵 by 물오리
  6. 2017.03.24 아리랑과 더불어 산다. by 물오리
  7. 2017.02.22 수화(手話)를 배우며 by 물오리 2
  8. 2017.01.26 김을 재며 --- 시어머님 생각 by 물오리 2
  9. 2017.01.24 by 물오리 2
  10. 2017.01.11 오십 대는 새댁 --- 인생 하프타임 - by 물오리 2

 

 

“ 엄마 홍콩여행 가실래요?“

“ 홍콩? 좋지”

큰딸이 느닷없이 권했을 때 멀지도 않고 일정도 삼박사일, 크게 힘들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쾌히 승낙했다. 준비하면서 볼만한 곳과 기온을 검색해 보니 홍콩은 우리나라보다 16~20도가량 높은 초가을이다.

정유년(丁酉年) 12월 중순, 성탄절을 앞둔 요즘, 전례 없이 한반도에 한파가 몰아닥쳐 영하 12도를 넘나드는 매서운 날씨인데, 홍콩은 여행하기 딱 좋은 가을이란다. 얇은 옷 한 벌과 몇 가지 부식을 챙겨 짐을 꾸렸다.

19세기 초, 아편전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홍콩, 그 홍콩이 백여 년 만에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그리하여 ‘홍콩특별행정구’가 설립되었고 긴 영국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렸다는 소식은 매스컴을 통해 들었다. 전자, 금융, 무역이 발달하여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내가 아는 지식은 여기까지인데 그래도 기대가 되었다.

우리는 따뜻한 반코트를 입고 홍콩 가는 밤 비행기에 올랐다. 낯선 나라를 가는 설레 임에 조금은 긴장이 되었다. 딸과 나는 어느 곳부터 구경할까 지도를 보며 살펴보았다. 드디어 3시간 남짓, ‘홍콩국제공항’에 도착했는데, 포근한 날씨에 입었던 외투를 벗어들었다. 반소매를 입은 사람, 패딩점퍼를 입은 사람, 긴 코트를 걸친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오고 간다. 짧은 시간의 비행에서 지구촌의 기온 차이가 신기했다. 현지 시각 새벽 1시, 우린 공항과 연결된 호텔로 향했다. 길목마다 곧 다가오는 성탄절 트리 장식으로 분위기가 조금 들떠 있었다.

첫날이 밝았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관광을 나섰다. 거리풍경은 중국인과 외국인, 각종 인종(人種)들의 공존이라고 할까, 이층버스가 다니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거리를 누빈다. 나는 먼저 란타우섬 서쪽에 있는 '옹 핑 빌리지'를 구경하기로 했다. 시내를 감상하며 낯선 사람들과 버스를 함께 탔다. 케이블카 터미널에서 승차권을 받아 들고 6km 나 되는 하늘길을 천천히 올랐다. 산과 바다, 그리고 해변을 따라 우뚝 선 높은 빌딩들, 란타우섬의 거대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저곳 사방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30분 걸려 정상에 도착했는데, 눈에 띄는 것은 안개 속에서 드러나는 34m 높이의 청동 좌불상이다. 큰 것을 좋아하는 그들답게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이곳은 불교를 테마로 마을을 조성했단다. 높은 계단 오르기 체험을 뒤로하고 딸과 나는 열대성 나무들이 있는 숲속을 걸었다. 전통차집이 있고 음식점, 그리고 홍콩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두 번째 날은 카오룽 반도에 있는 호텔인데 야시장 근처라고 했다. 낡은 고층 아파트가 보이고 주변은 공구상가들이 가득한 지역이었다. 짐을 풀고 침사추이로 가는 일정이다. 나가는 길에 동네 주민들이 이용한다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간판에는 4대째 내려오는 음식점이라고 오래된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나는 채소가 들어간 국수를, 딸은 닭고기 볶은 밥을 주문했다. 이내 음식이 나왔는데 반찬이 한 가지도 없다. 그 흔한 단무지도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들 주문한 음식 한 가지만 놓고 먹는다. ‘우리는 찬이 풍성하게 나오는데’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져간 김치를 꺼내 놓았다. 침사추이 거리는 유럽의 어딘가를 떼어 놓은 듯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예전에 쇼핑하러 홍콩 간다는 말은 들었다. 명품을 싸게 팔아서라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그 명품에 별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 물건도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이다. 값비싼 물건들을 눈으로만 구경하고 우리는 곧장 야시장 몽콕에 도착했다.

어둠이 슬금슬금 잦아드는데 시장 통로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어느 팀은 아코디언연주를, 어느 팀은 반짝이 옷을 입고 우아한 댄스를, 그리고 신나게 드럼을 치는 재즈팀, 저마다의 연주와 노래로 솜씨를 발휘하는데 나이가 지긋한 실버들이 많았다. 잠깐 음악 감상을 하고 시장에서 유명하다는 딤섬 집을 찾아갔다. 번호표를 받고 자리에 앉고 보니 이곳저곳 한국의 젊은이가 많았다. 몇 가지 주문을 해서 맛을 보았는데 역시 느끼하고 향이 강했다. 그리고 나는 그 유명한 야시장을 돌며 구경을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눈에 들어오는 상품은 허술했다. 결국, 바나나를 넣어 만든 과자와 사탕 몇 개를 샀다.   삼일 째 되던 날, 행정 중심지라는 빅토리아 피크 관광인데 해발 396m에 있었다. 빅토리아 산의 미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정상 중간쯤, 중국의 프라이팬 모양으로 지었다고 안내지에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마담투소 홍콩 박물관’을 관람했다. 아시아 유일의 밀랍인형 전시관이다. 마이클 잭슨, 비틀스, 성룡, 오드리 헵번,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해를 품은 달’에서 주연을 한 김수현씨 까지, 백여 점이 전시되어있었다. 실감 나는 피부와 표정, 실물 크기, 어찌나 정교한지 그들과 마주 보고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들과 정답게 포즈를 취하고 기념 촬영을 했다. 딸은 꼭 봐야 하는 밤 풍경이 있다고 나를 앞세워 택시를 잡았다. 완차이에서 침사추이로 가는 작은 뱃길, 승선하기 전부터 야경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마치 별천지에 온 듯했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 옛날 유행가지만 그 노랫말이 떠올랐다. 습도가 높았으나 그 밤은 고단해서 단잠을 잤다.

귀국하는 날, 10시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우리는 서둘러 짐 정리를 하고 6시에 호텔에서 나왔다. 택시를 잡아탔는데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다. 서툰 중국말로 딸은 열심히 설명했고 알아듣는 듯했는데, 그 기사분은 엉뚱한 곳을 돌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을 했고 딸아이는 길 찾기를 핸드폰에서 보여주며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가까스로 탑승했다. 결국, 빙빙 돌아 요금은 더 나왔고 좌석에 앉았을 때, 비로소 기사분의 의도를 알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홍콩의 주민 90프로가 중국인이라는데 본토의 느낌이 많이 났다. 내가 본 그들은, 옷차림도 어둡고 표정도 어두웠다. 높은 건물 밖으로 빨래를 널었는데 혹여 바람에 떨어지면 그 옷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여유 있는 부자들도 있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좀 고달파 보였다. 어찌 되었던 큰애가 주선해준 홍콩여행, 공항이 있는 란타우섬, 대륙이 붙어 있는 구룡반도, 홍콩의 중심지 홍콩섬, 나는 곳곳을 즐기며 구경을 했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날, 이곳에서 일요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또 감사했다. 

여행 중에 가장 기분 좋았던 것은, 야시장 길에서 만난 우리나라 화장품 매장이다. 한국의 화장품이 질이 좋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리고 어려웠던 것은 역시 음식이었다. 딸은 그런대로 이곳 음식을 먹는데 나는 나이든 토종 한국인이라 그런지, 도무지 입맛에 맞는 것이 없었다. 진한 향이며 그 느끼함, 조금 싸서 간 김치와 고추장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오후 세시 넘어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아침도 거르고 고생하다 밟은 우리 땅,며칠 만에 만나는 내 나라 사람들은 환하고 예뻤다. 옷차림도 표정도 밝고 활기차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칼칼한 주꾸미볶음밥에 된장찌개를 먹었다. 그간의 메스꺼움이 단번에 사라졌다.

역시, 살기 좋은 “우리나라 좋은 나라네.”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나왔다. 딸은 나를 보고 웃었다.

 

 

                                한국문학인- 2018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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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


긴 둑길에 하얀 망초 꽃이 무리 지어 피어있다.

바람을 가르며 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달이 뜰 때쯤 핀다는 달맞이꽃, 넝쿨로 뻗어서 군락(群落)을 이룬 분홍색 메꽃, 억새는 내 키를 넘어 가을을 예고한다.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고 해바라기도 입술을 열었다. 봄에 피었던 유채는 씨를 잔뜩 안았고, 엉겅퀴, 민들레, 명아주, 모두 반가운 얼굴들이다.

꽃길을 따라 달린다. 칠월 초 장마라 하더니 잠깐 소강상태다. 해는 구름 속에 숨어 쾌적한 날씨, 천변 풀을 깎는 아저씨들 덕분에 풀 향기가 진하다. 비가 온 뒤라 물이 많아진 개천에는 백로 두 마리가 수초 속을 뒤지고 있다. 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시원하다. 아니 가슴 속까지 시원했다. 머플러가 날린다. 나는 모자 끈을 단단히 조였다.

“와, 좋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앞서 가는 친구는 초보가 잘 따라온다고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든다. 금천 대교를 지나 철산교, 광명대교, 그리고 오목교가 보인다. 엄마와 딸이 메밀꽃이 핀 모퉁이를 돌아가고 친구 사이인 듯, 젊은 아낙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야기를 하며 페달을 밟는다. 간간이 쉴 수 있는 의자가 있고 식수도 있다. 친구와 나는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벤치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사십 대 중반에 나는 자전거 타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헌데 둔해서 그런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만큼 만만치가 않았다. 웬일인지 자전거에만 오르면 두려움이 앞섰다. 차가 오면 마음은 졸아들고 장애물이 나타나면 피해야지 하면서도, 결국은 그쪽으로 가서 들이받고 다리엔 온통 멍이 들었다. 그리하여 체념한 터였다.

‘안양 천변에 아름다운 꽃길이 생겼다’는 문구가 지역소식지에 실렸다. 나는 저녁을 이르게 먹고 동생이랑 꽃구경을 나갔다. 시흥대교를 건너 둑을 내려가니 천변(川邊)이 말끔하다. 산책하는 길이 있고 그 옆에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키 작은 채송화가 보이고 빨간 봉선화도 있고, 길섶에는 낯익은 꽃들이 다소곳이 피어있다. 한강으로 유입되는 안양천은 잔잔하게 여울지며 흘러간다. 언뜻 유년의 고향 냇가가 떠오른다. 어디선가 맹꽁이가 울었다.

“어머, 맹꽁이 아냐”

“그러네, 시골에서나 들었는데 ”

동생과 나는 놀랐다. 이곳에서 맹꽁이 소리를 듣다니 반가웠다. 한강 둔치까지 이어져 있다는 이 자전거 길을 나는 달려보고 싶었다.

다시 한 번 도전이다. 안장이 낮은 자전거를 장만했다. 연습할 때는 두꺼운 바지를 입고 그 속에 내복하나를 더 껴입으란다. 다치는 것을 염려하는 친구 말이다. 시장 볼 때도 가벼운 볼일도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친구, 그래서 부러웠던 그 친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올라타고 내리는 것과 브레이크 잡는 것, 그리고 평행감각을 익히는 것 등, 몇 가지 설명을 들었다. 핸들을 잡고 불안해하는 나를 보고 한마디 한다.

“자동차 운전은 잘하는 사람이 겁도 많네.”

“이 친구야, 자동차는 네 발이고 자전거는 두 발이잖아”

나는 자전거를 끌기도 하고 타기도 하면서 아파트 마당을 돌았다. 이른 새벽과 늦은 저녁, 차가 다니지 않는 한가한 시간을 골랐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제자리에 서 있고 차를 만나도 멈추었다. 열흘쯤 지났을 때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조금씩 즐거움이 따랐다. 드디어 오늘 한강 둔치로 목표를 정하고 출발한 드라이브 길이다. 자전거 길을 따라 달리는 길은 꽃들로 이어졌다. 뿐인가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은 활기가 넘쳤다.

“바람 돌이 같네.”

친구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긴 행렬은 사라져 간다. 천변을 따라 이어져 있는 갈대숲과 롤러 스케이트장,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느라 작업이 한창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담소하며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했다.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한가한 시간을 즐기는 시민들이 보기 좋았다. 곧 도착한다는 말을 들으며 부지런히 따라간다.

“초봅니다. 길 좀 비켜 주세요.”

앞서 걷던 사람들은 선뜻 비켜준다. 핸들 앞에 울리는 벨이 있건만 아직은 말이 더 빠른 것을 어찌하랴, 이대목동병원이 저만큼 보이고 모퉁이를 돌고 나니 안양에서부터 흐르는 물이 합수(合水)되는 한강이다. 확 트인 시야에 강물은 넘실대고 건너편 하늘공원이 보인다.

작지 않은 이 나이에 해냈다는 성취감이 나를 조금 들뜨게 했다. 기분이 좋았다. 바람을 가르며 페달을 밟는 것, 그것은 즐겁고 유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통쾌했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내가 이렇게 해내고 보니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우울하게나 몸이 처지는 날은 자전거를 타보라 하고 싶다. 그리하여 온갖 꽃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라, 새로운 경험은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맑은 물이 흐르고 달맞이꽃이 피었던 내 고향, 이맘때면 친구들과 거닐었던 둑길, 그 둑길을 나는 여기서 본다. 꽃길 따라 페달을 밟는 내 눈앞으로 20년 전 두고 온 고향이 선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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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

카페 플로라

수필[Essay] 2017. 4. 22. 18:01

 

   '플로라’ 봄의 여신이란 이름으로 대학가에 카페 문을 연지 삼 개월이 되어간다. 아침청소를 하고 나면 커피를 내리는데 그 은은한 향은 언제나 기분을 좋게 만든다. 금세 만들어 오는 케이크도 있고 생과일주스도 있다. 힘든 입시 공부를 마치고 대학생이 된 풋풋한 얼굴들, 그들은 짝을 찾기에 분주하다. 이십여 명이 함께 만나는 그룹 미팅이 있고, 삼삼오오 몰려와 만나는 소개팅이 있는가 하면, 이르게 짝을 찾은 연인들은 다정하게 손잡고 들어와 이야기꽃을 피우며 마냥 즐겁다.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상기된 얼굴이 막 피어난 꽃송이다. 인간도 때가 되면 짝을 찾고 둥지를 틀고, 그 보금자리에서 저마다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짝 찾는 일은 인간대사(大事)라. 나는 재미있어서 자꾸만 눈길이 그쪽으로만 간다.

어느 해던가 늦은 여름, 경상도 문경쯤이었을 것이다. 뭉게구름이 걸린 산모롱이에 야트막하게 자리한 카페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통나무로 난간을 두른 발코니에는 넉넉한 의자가 놓여있고,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가니 단순하게 꾸며진 실내는 고즈넉한 시골 오후를 낭만으로 채워주고 있었다. '해변의 정사'라는 희한한 이름의 칵테일을 마시며 모처럼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동안 이곳저곳 우리 강산을 돌아보며 마음을 빼앗긴 카페가 어디 그곳뿐이겠는가. 아늑한 분위기에 편안한 실내, 향기 좋은 차 마시며 누구나 편히 쉬었다가는 공간은 내 마음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와도 좋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찾아와 즐거운 이야기로 담소하며 마냥 앉아 있어도 좋다. 일상이 고단할 때 요한슈트라우스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 이나 아니면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 들으며 차 한 잔에 고단함을 씻는 그런 자리, 그들을 맞이하는 내 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그려 왔었다.

윤재천 선생님의 수필집 '구름 카페'에는 역마살 낀 나그네가 있고 고갱의 그림도 있지만, 나는 좋은 시구 몇 점 걸어두고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 그림도 좋고 아침이슬 반짝이는 숲 속 그림도 좋았다.

15 년 하던 일을 정리하고 무료하게 보낸 지 삼년, 울적해하는 내 마음을 딸들은 알고 있었는지 무슨 일이든 다시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 나는 카페가 떠올랐다.

큰 아이가 실내 장식을 맡고, 디자인을 전공한 막내가 간판을 고안했다. 실무(實務)는 둘째와 내가 하기로 하고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내장식이 젊은 세대들의 취향으로 가고 있었다. 심플하고 모던한 분위기가 깨끗하고 단순했다. 내가 그려 왔던 카페는 사라지고 손님들과 어울려 보겠다던 꿈도 사라졌다.

"대학가에 있는 카페에 젊지도 않은 네가 있으면 오는 애들이 편하겠니? 참 꿈도 야무지다."

핀잔을 준 친구 말대로 안타깝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방일 돕는 것과 청소뿐이었다. 그래도 카운터에 자리 하나 마련했는데 아이들은 주문이 많다. 노란 머리나 빨간 머리, 기이하게 염색한 머리를 봐도 절대로 쳐다보지 말고, 담배를 피워도 혹은 뽀뽀를 해도 웃지 말란다. 한동안 신경이 쓰여서 거동하기가 편치 않았다. 그러나 한두 달 지나면서 '엄마 같은 내가 좀 있기로서니 어떨라고.' 하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럭저럭 퓨전 재즈도 귀에 익어가고, 무엇보다도 우리 카페를 찾는 이들이 편히 쉬었다 간다.

"케이크 참 맛있어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꽃으로 치면 막 피어나는 봉오리, 계절로 치면 생기 넘치는 봄이라 순수하고 젊은 그들 덕분에 나도 조금 젊어지는 것 같다. 이제는 아늑하고 편한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여유도 부린다. 그동안 과로했는지 몸살이 와서 나는 며칠 쉬고 있다.

싸리 꽃이 핀 동네 산을 오르는데 다람쥐 두 마리가 전나무를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달음질친다.

"너희도 사랑놀이하니?"

나는 한마디 던져주고 웃는다. 그리고 카페 '플로라'에 쌍쌍이 앉아 있을 젊은이들을 떠올리며 또 한 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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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

사랑한다는 말

수필[Essay] 2017. 4. 16. 20:06


                                 

미명(未明)에서 한 줄기 빛으로 깨어나는 자연을 담았다.

하늘을 배경으로 억새꽃이 춤추는 광활한 들녘, 삼나무 숲길과 아름다운 제주의 사계, 그는 신비로운 순간을 렌즈에서 잡았다. 그러나 철저하게 홀로 쓸쓸히 살다간 그의 생은 깊은 겨울처럼 추웠다.

이 글은 제주에 반해 그곳에서 살다간 사진작가 김영갑의 이야기다. 그가 남긴 유고집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에서 ‘단 한 번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다.’라는 그의 글을 보았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짠해 왔다. 그리고 그 말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왜 그는 한 번도 하지 못했을까.

‘사랑’이란 단어의 사전풀이는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이다. 참 좋은 말이다. 그 좋은 말을 우리는 얼마나 하면서 살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을 빼놓고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사랑은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따뜻하고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사랑을 노래한다.

인간은 탄생의 순간부터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란다. 그 사랑 속에서 성장하여 청춘이란 빛나는 시절에 열정적인 사랑을 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는 가족으로 귀착한다. 사랑이란 말은 어쩌면 우리 삶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지 싶다.

고향 동창이었던 남편은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가 내게 해준 사랑의 고백은 ‘내 사람이 되어줘’였다.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고 문득문득 사랑한다는 그 말이 듣고 싶었다.

“당신 나 사랑해?”

“이사람아,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아! 그래 사랑해”

마지못해 한마디 해주던 생각이 난다. 어디 나뿐일까, 지난번 문우들 모임에서 옆자리에 앉은 B 여사에게 느닷없이 물어보았다.

“바깥어른께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보셨어요?”

“아니, 나는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 보지 못했어요.” 하며 멋쩍게 웃는다.

우리 세대들은 마음은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을 표현하지 못했다.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 사상에,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란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나이 되도록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글로는 써보았으나 말로는 쑥스러워하지 못했다.

첫 손자가 그야말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이제야 말문이 트여서 ‘사랑해’ 라는 말을 아낌없이 해 주고 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자기 마음을 당당하게 표현한다. 어쩌다 TV 방송을 보면 노인들도 안아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진행자가 유도하고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제는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이웃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표현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그 말을 하므로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따듯한 삶이 되겠는가, 삶의 근원이며 원천이 되는 사랑, 그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새겨 볼 일이다.

사람의 마음은 입발림이라 해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연구 발표가 나온 지 오래다. 마치 억지로 웃어도 좋은 호르몬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라도 사랑하는 가족에게 또는 친구에게‘사랑한다는 말’을 아낌없이 해주며 살아야겠다.

제주도의 바람이 된 사진작가 김영갑, 그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아쉬움으로 남기지 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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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

    

            

    사월 초, 봄비가 내린다.

    아파트 주변에 있는 개나리가 꽃 피울 채비를 한다. 이맘때가 되면 마음 저편에 접혀있던 아픈 기억이 나를 흔들어 댄다. 1980년 봄, 그날도 가랑비가 내렸다. 큰 트럭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종알대는 꼬맹이들을 앞자리에 태우고 충청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출발했다. 시원하게 뚫린 중부 고속도로 갓 길엔 노란 개나리가 봄비를 머금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결혼생활 9년, 딸아이 셋과 나를 두고 그는 급하게도 먼 길을 떠났다. 부부로 인연을 맺어 자식을 낳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며 변함없이 살자는 말,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떠났다. 그러나 그 사랑은 두 사람의 인고(忍苦)를 감당해야 하며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임을 우리는 때로 잊고 산다. 슬픔은 남아 있는 자의 몫이라고 했던가, 그의 빈자리는 어린것들을 하루아침에 아빠 없는 아이들로 만들어 버렸다.   

  “울고 싶을 땐 실컷 울어라. 그러나 조만간 울음을 그치고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아라. 좌, 우, 위, 아래를, 경거망동해선 안 되며 너를 바라보는 눈망울을 생각해라. 침착하게. 침착하게. 침착하게......”

   침착 하라는 말을 세 번이나 하신, 내 스승님은 소식을 듣고 긴 편지를 보내주셨다. 비로소 나는 마냥 이렇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란 언제 어떻게 올지 그 누구도 모르는 일, 조금 일찍 떠났을 뿐이라고 납득은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 년 탈상을 하고, 시어머님의 만류도 뿌리 치고 나는 그의 흔적을 뒤로했다.

     이곳 시흥은 서울이라고는 했으나 변두리였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서울과 안양을 오가는 차들의 소음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조각배, 내 마음이 그랬다. 그로부터 나는 일하는 엄마가 되었고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마음도 몸도 바빴다. 그러나 가슴엔 소망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잘 자라 주는 것과, 내가 시작한 일이 아이들과 함께 자라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했다. 그 무렵, 우연히 박완서 씨의 단편‘엄마의 말뚝’을 읽게 되었다. 자전적인 소설로 그분의 어머님은 자녀의 장래를 위해 대처(大處)로 나왔다. 삯바느질로 장만한 산꼭대기 허름한 집, 그 집은 자식을 잘 길러 보겠다는 엄마의 의지의 말뚝이 깊게 박혀 있었다. 시대는 달랐으나 뭔가 나에게 한 수 던져주는 것 같았다. 

   우선 밝게 컸으면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어린이날은 하던 일을 접고 아이들과 함께했다. 당시 세종 문화회관 대강당은 오월이면 어린이를 위한 뮤지컬 공연을 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연극 관람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파랑새, 피터 팬, 이상한 나라 앨리스, 그 일들은 여러 해 계속되었다. 지금은 작고한 분이지만 연극배우 추송웅 씨가 기저귀를 찬 아기 역할을 해서 관객의 박수를 받았고, 가수 윤복희 씨는 마녀로 분장해 열연을 했다. 돌아오는 길엔 조잘조잘 말들이 많았다.

   학기 초에는 잘 보살펴 달라는 편지를 담임선생님께 썼으며, 방학이 되면 엄마가 하는 일을 함께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를 태운 조각배는 세상이란 험란한 바다를 그런대로 순항할 수 있었다. 

   '인간은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한다고 하지만, 주님의 커다란 섭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며, 어려울 때가 있으면 그 후에 기쁨을 꼭 마련해 놓으신다'는 위로의 말을 고향 선배님은 늘 해주셨다. 덧붙여 그대는 잘해낼 수 있을 거라며 힘찬 응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응원에 힘을 얻었고 어려움이 생겼을 때마다 힘겨웠지만 털고 일어섰다. 또한 나를 보고 자라는 내 아이들이 어려울 때, 이 어미처럼 잘 이겨내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 주위에는 내 삶을 격려해주는 따뜻한 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 기댈 수 있었고 돌아보면 감사한 마음뿐이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열심히 일하고 당당하게 살아라.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로운 태양이 솟아오른다.”

   성년이 된 딸아이들에게 지금도 내가 해주는 말이다. 노란 개나리가 그 동안 몇 번이나 피고 졌는지, 둘째가 결혼과 함께 보금자리를 찾아갔고, 큰아이는 조각을, 막내는 무역 일을 하고 있다. 영원한 타향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이곳이 이제는 정이 들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봄볕이 화사하다. 아파트 주변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성경의 그 말씀을 생각하며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개나리, 이제는 정녕 너를 슬픈 마음으로 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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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하면 나는 강원도 ‘정선아리랑’이 떠오른다.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 장마질라나

만수산(萬壽 山)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이렇게 시작되는 정선아리랑은 사람의 간장을 녹이듯 구성지게 넘어간다. 가사를 살펴보면 무척 다양하다. 사랑도 노래했고 쓸쓸함도 호소했고 시름을 달래기도 했다. 민초들의 삶을 그대로 노랫말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슴 깊이 다가온다.

    아침산행을 하는 벗 중에 민요를 전공으로 하는 친구가 있는데, 어찌나 맛나게 잘 부르는지 듣고 있으면 절로 흥이 난다. 가끔 한 대목씩 따라 부르다 보니 나도 그 맛을 조금 알게 되었다. 정선아리랑은 편안한 평음(中音)에서 시작되어 가락은 길게 넘어가는데, 구부리고 흔들고 내지르고 끝소리에 변화를 주는 것이 이 노래의 특징이다. 간혹 청승 끼가 있어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음절 하나하나에 뜻이 있고, 옛사람들의 가슴 속 한풀이에 한몫했다면 더 할 말이 무엇이랴.

   민요 아리랑은 60가지나 된다고 한다. 지방마다 아리랑이 있어 그곳 토양에 맞게 노랫말을 만들었다. 황해도 해주 아리랑, 강원도 정선 아리랑, 경상도 밀양 아리랑, 전라도 진도 아리랑, 경기도는 본조아리랑 등. 그 밖에도 팔도를 대표하는 아리랑이 있고, 긴 아리, 짧은 아리, 그야말로 수없이 많다.

    우선 귀에 익은 것을 살펴보면 경상도 말씨는 격하고 열정적이다. 그래서 밀양아리랑은 조금 억세게 불러야 제 맛이 난다. 세마치장단으로 슬픈 느낌은 없고 그곳 사람들처럼 꿋꿋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또한, 평창과 함께 동남부에 자리한 강원도는 험한 산이 많다. 그리하여 그 험준한 산을 오르며 부를 수 있도록 느린 12박이 정선 아리랑이다. 반면에 서둘러 내려와야 할 때는, 바쁜 걸음에 맞는 엮음 아라리의 빠른 박자이다.

‘태산준령 험한 고개, 칡넝쿨 얼크러진, 가시덤불 헤치고.’ 듣고 있으면 정말 단숨에 내려왔을 것 같다. 기름지고 드넓은 호남평야에 진도 아리랑은 자진모리장단이다. 농요로도 불리고 여러 사람이 어울려 놀 때도 즐겨 부르며, 선소리꾼이 두 장단을 메기면 남은 사람이 받는 흥겨운 가락이다. 가사보다 엮음의 묘미가 특색이다.

‘서편제’ 영화를 보면, 화면 가득 청산도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가 보이고 섬 전체가 푸르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에’ 밭을 따라 쌓은 돌담길을 걸어가며 송화가 선창하면, 후렴을 아버지와 동생이 받았다. 그것이 진도 아리랑이다. 그곳 풍광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그리고 외국인도 잘 따라 부르는 경기도 아리랑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일제 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캄보디아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 자신의 이름과 나이, 고향마저도 잊은 그녀가 부르던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그것은 한국인끼리만 통하는 정서였다. 이토록 애창하는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노래이다.

   아리랑에는 풍자와 해학이 들어 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엄동설한에 꽃을 본 듯 반가워하라는 얘기다. ‘춥냐 덥냐 내 품 안으로 들어라, 베개가 높고 얕거든 내 팔을 베어라.’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엔 수심도 많다. 인생이 살면 몇 백 년 사나 개똥같은 한세상 둥글둥글 사세.’

   가사를 살펴보면 웃음도 나오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고달프고 힘든 삶을 아리랑 가락에 담았다. 힘차게 내지르고 부드럽게 풀어주고, 나도 친구와 한가락 부르고 나면 체증이 뚫리는 듯 속이 시원하다. 이래서 민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멋과 맛을 알고 있다. 때마침 우리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아리랑’을 잘 부른다. 나도 어디서 아리랑이 울려 퍼지면 우리는 같은 겨레 같은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우러나온다.

  

  아리랑 -아리랑 -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이 땅 어느 곳에서나 부르는 노래 아리랑, 우리는 아리랑과 더불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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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손으로 왼팔을 쓸어내리며 주먹을 살짝 쥔다. 동시에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이 행동은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수화 인사다. 나는 요즘 수화를 배운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 서서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해본다. 몇 가지 단어와 노래를.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사랑으로’라는 가요인데, 서너 가지의 동작이 가물가물하다. 교본을 보면 지루함을 배려했는지, 가끔 악보와 함께 노래가 실려 있다. 수화는 가슴 높이에서 양어깨를 한계점으로 하는데, 필요에 따라 동작을 크게 하기도 작게 하기도 한다.

   수화가 목소리를 대신한다면 손가락으로 하는 지화(指話)는 필체를 대신한다. 강의를 듣기 시작하면서 놀란 것은, 수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합리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중국어의 한자를 그대로 접목한 용어도 있고, 표현하기 어려운 낱말은 생긴 모양에서 특징을 잡았다. 봄은 태어남을, 여름은 더위, 가을은 바람, 겨울은 추위로 표현했다. 그리고 더욱 기발한 것은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하는 손짓, 그 무언(無言)의 대화를 수화에서는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가라, 먹는다, 드리다, 받다, 그 외에 많은 동작이 포함되어 있었다.

 

   강의하는 선생님은 수화가 이용되기 시작한 유래를 흑판에 그려가며 설명을 한다. 토씨가 생략되는 것과 문장 배열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 어미의 변화가 표현 강조로 많다는 것도 이야기한다. 청각장애인과 대화를 할 때는 예의를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고, 동작을 정확하게 해야 하며 무엇보다 그들의 감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동정은 절대 금물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여유 있게 하란다. 나는 꼼꼼하게 기록을 했다.

 

    나에게는 농아 조카딸이 있다. 그 딸을 보며 늘 마음 아파하던 올케가 지지난해 지병으로 돌아가고, 궁금하던 차에 이번 설 명절에 우리 집을 찾아 주었다. 나는 반가워서 덥석 안았지만, 엄마를 잃은 슬픔 때문인가 웃는 얼굴에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때때로 그 아이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귀여운 발음으로 말을 막 배울 무렵, 급체한 것이 경기(驚氣)로 이어지고,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한방으로 뛰었으나 고막은 파손되어 허사였다. 들리지 않으니 몇 마디 하던 말마저 하지 못했다. 할머니도 엄마도 가족 모두 발을 동동 굴렀지만, 야속한 운명은 끝내 그 아이를 청각장애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동안 농아 여고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뜻이 맞는 배필을 만나 지금은 고맙게도 두 아이 엄마가 되었다. 조카딸이 돌아간 다음 많은 생각을 했다. 미루고만 있었던 수화를 배우자, 그래서 그 아이의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우리나라 청각장애 인구는 뜻밖에 많았다. 선천적인 농아보다는 후천적인 농아가 많고, 장티푸스를 앓다가 고열로 고막이 손상될 수가 있는가 하면, 조카딸처럼 급체가 경기로 이어져 청력을 상실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일상에서 쉽게 생기는 질환으로 농아가 된 사람들이기에 참으로 안타까웠다. 삼 개월로 접어들고 초급반에서의 마지막 수업시간, 나는 귀를 막아 보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는 그야말로 답답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었다. 선생님의 음성은 물론, 그나마 배운 수화도 들리지 않으니 뒤죽박죽이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들리지 않는 세계- 그것은 무슨 말로도 표현할 길 없는 참담함이었다. 그

리고 나는 조카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이 적막 속에서 살고 있을 그 아이의 고충을 생각하니 어느 한 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재잘거리는 꼬마들의 웃음소리, 노래하는 새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아름다운 모든 소리들, 어찌 꼽을 수 있으리.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마냥 시야가 흐려짐을 어쩌지 못했다. 그간 짐작만 했을 뿐, 무심하게 지낸 세월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잘 지내니, 고모야. 오늘 저녁 함께 먹자. 데리러 가도 될까.”

“네 좋아요. 기다릴게요.”

 

   손 전화에 문자를 보내니 이내 답이 온다.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며 ‘고모가 수화를 배우고 있어요.’

   동작이 더듬더듬했는데도 뜻이 전달된다. 놀란 얼굴로 내 손을 잡는다. 서툴지만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필담으로 나누는 대화보다 의사소통이 훨씬 쉬웠다. 이제 우리 더불어 살자. 수화로 하니 고맙다는 답을 한다.

 

   지난 일요일, 아이들이 읽을 책을 사야겠다는 문자가 왔다. 시간이 괜찮다면 고모와 함께했으면 하는 내용이다. 책을 많이 읽혀야 한다는 내 말을 귀에 담았나 보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만나기로 한 서점 앞에 도착했다. 무슨 책을 골라줄까, 조카딸이 읽으면 좋을 책도 두어 권 사 주어야지 하고 살펴보고 있는데, 내 어깨를 덥석 끌어안는 손길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다가선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책도 고르고 이것저것 쇼핑을 했다. 돌아가는 차 속에서 조카는 유난히 많은 말을 했다. 아이들 이야기, 신랑이야기, 그리고 까르르 웃는다.

   내가 배우는 수화 덕으로 조카의 그 쓸쓸한 마음을 덜어 줄 수만 있다면 내 무엇을 더 바라랴, 손을 흔들며 집으로 들어가는 조카딸 등 뒤로 사월의 벚꽃은 화사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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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김을 잰다.

   시골 사는 동창 중에 깨 농사를 짓는 친구가 있어 들기름을 부탁했더니 택배로 왔다. 금세 짠 들기름에 참기름 조금 넣어 한 장 한 장 재다 보니, 문득 이맘때면 김을 재시던 시어머님 생각이 난다.

   동지섣달 긴긴밤 두레상 위에 커다란 쟁반을 놓으시고 조선 김을 솔잎으로 정성껏 바르시던 어머님, 그 어머님 생각을 하면 단아하고 고우셨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키는 작으셨지만 매무새가 단정하셨고 어머님 옆에 가면 언제나 코티 분 향기가 났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머리부터 가지런히 손질하시고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뵌 적이 없다.

  음식 솜씨 또한 남달라 어머님이 해 주시는 음식은 참 맛이 좋았다. 요즘처럼 설 명절이 다가오면 큰 가마솥에 사골을 고아, 양지, 간, 콩팥, 무, 다시마, 그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면 그야말로 일품,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어느해인가 시월 상달 고사를 드리는 날이었다. 돼지 머리가 그대로 배달되었는데 어머님은 돼지 입을 벌리고 이빨을 구석구석 칫솔로 닦으셨다. 눈은 뜨고 있고 젊은 새댁은 도와드리다가 도망을 쳤다. 일을 잘하지 못해서 그릇도 잘 깨 먹고 실수 연발이어도 늘 사랑으로 감싸 주셨던 어머님.

   별이 초롱초롱하던 여름밤, 홑이불 다림질 하실 때 나는 그 끝을 잡고 있었다. 걸터앉은 툇마루에서 숯이 담긴 손다리미를 요령있게 이리저리 구겨진 홑청을 다리시며 하신 말씀은 지금도 미소가 지어진다.

“애야, 지금은 혼인 말이 들어오면 맞선을 보지 않니, 나는 사진만 보고 시집을 왔단다. 만약에 선을 보았다면 키가 작아 너희 아버님과 혼인을 했을까싶다 나는 그 시절 덕을 보았지.”

   하시며 수줍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긴 아버님은 키도 작지 않으셨고 지금으로 말한다면 훈남이셨다. 아들 여섯 딸 둘, 팔 남매를 사랑으로 키우셨고, 며느리들도 언제나 따뜻한 눈으로 봐주셨던 어머님, 그 시절의 추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정유 년 설 명절 앞두고 나는 그 어머님이 새삼 그립다.

  이번 설에 외손들이 우리 집을 다녀간다. 손녀딸이 유난히 김을 좋아해 동지섣달 긴밤, 나도 어머님처럼 조선 김을 정성껏 잰다. 조잘대며 맛나게 먹을 손녀 딸 얼굴을 떠 올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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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Essay] 2017. 1. 24. 05:53


                               

   

   오랜 세월 벗으로 지내는 친구의 어머님은 올해 아흔넷이시다.

“ 어머니, 쌀 빻아 왔어요.”

“ 응, 쌀 왔어”

   가끔 정신을 놓치기도 하는 어머니는 정미소에서 막 찾아온 쌀을 만지며 환하게 웃으신단다. 친구는 올가을도 어김없이 벼농사를 거두어 어머님께 먼저 보여드린 것이다. ‘내 자식들 입에 쌀밥 들어가는 것’을 보아야겠다고 젊은 시절 악착같이 일을 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시골 고향에 논을 장만한 것은 1965년대라 했다. 그로부터 오십 여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친구는 아직도 어머니 이름 그대로 그 땅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어머님의 자존감을 지켜드리고, 해마다 햅쌀을 보며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기 위함이다.

   1965년 그때는 나라도 국민도 모두 어려웠던 시기였다. 한국전쟁을 겪고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국민의 식생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부모님들은 빈곤 속에서 ‘보릿고개’라는 고개를 넘어야 했던 때,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쌀밥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보리쌀에 쌀을 한 줌 넣어 밥을 지으면, 아버지와 오라버니 드리고 남은 식구들은 깡 보리밥을 먹었다. 어쩌다 아버님이 드시던 쌀밥을 남기면 그것을 먹으려고 자매들끼리 다투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야말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마른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와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만큼 즐거운 소리가 없다’라는 옛말, 그 말의 뜻을 우리 세대는 알고 있다.

   며칠 전, 햇살 바른 곳에 쌀이 널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구미’라는 쌀벌레가 눈에 띈다.

   “ 떡 해 드실래요? 벌레가 좀 낫지만, 쌀은 괜찮아요.”

   경비아저씨 말이다. 아파트 위층에 사는 젊은 아기 엄마가 버려달라고 내놓은 쌀이라고 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가래떡을 해 먹기로 했다. 모처럼 이웃과 나누어 먹는 떡 잔치를 했다.

  쌀은 영양이 풍부하다고 한다. ‘본초강목’ 약학 서에는 ‘쌀은 위기(胃氣)를 평 하게하고 몸에 기운을 돋아 정신이 어지러운 것을 없애준다’ 했고, 또한 쌀에는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 영양소인 탄수화물이 72퍼센트나 들어 있다고 한다. 그 밖에 단백질, 지방, 식이섬유, 무기질, 비타민도 B1, B2, 복합체가 들어있어 혈중코레스톨과 중성지방 농도를 감소시켜주며 생명을 유지 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식물이라고 했다.

   2016년 요즘 쌀 소비가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사람이 하루에 밥 두 공기를 채 먹지 않는 다는 것이다. 반면에 피자나 햄버거 등, 밀가루 소비량이 늘어 어른은 물론, 어린이 당뇨와 비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 나라 기둥인 꿈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선다.

   갓 시집을 갔을 때, 시어머님은 쉰밥을 찬물에 헹구어 드셨다. 쌀 한 톨에는 농부의 피땀이 서려 있고 수십 번의 손이 가야 밥상에 오르게 되는데 그 수고와 땀을 알아야 한다는 지론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상 앞에서 흘리는 밥도 주워 먹었다.

   지구촌 곳곳에는 지금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끼니 해결 못 하는 이들이 있다는데, 벌레가 좀 났다고 쌀을 버리는 철부지 새댁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올해 공주시가 우리 쌀 소비촉진을 위해 급식 요리사 대상으로 우리 쌀 식품 가공 기술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쌀 파스타, 쌀 떡볶이, 쌀 빵, 더 많은 음식이 개발되어 쌀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시름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쌀, 없으면 살수 없는 귀한 쌀, 이 쌀의 소중함을 젊은이들이 알아 밀가루 보다는 쌀 소비가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은 따끈한 쌀밥을 지어, 추억이라는 이름과 함께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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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여 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여고 시절 아껴주시던 스승님께 인부전화를 드리니 내 나이를 물으셨다.

   “ 저도 육십이 다 되어 가는데요.”

   “ 그래, 아직은 새댁이네.”

   갑자기 하시는 말씀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 나이가 무슨 새댁? 괜한 말씀을 하시네.’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십 년,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이렇다 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는데 세월은 백 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지나가고 나는 육십 대 끄트머리에 와 있다. 나이란 놈은 많이 먹을수록 가속도가 붙는다고 하더니 괜한 말은 아닌 듯싶다.

  우리 반 기타 선생님은 이십 대 후반이다. 얼굴도 미남이지만 적당한 체격에 속 깊은 마음까지, 요즘 젊은 사람과는 달리 넉넉한 품성이 보인다. 기타를 배우는 회원이 실버들이라 익히는 속도가 느려 답답할 텐데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자상하게 지도한다. 뉘 집 아들인지 고맙기도 하고 기특한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 나이를 물어보았다.

 “아, 어머니요, 오십 대 후반이신데요.”

  “어머나! 그래요, 어머니가 새댁이네”

    젊은 선생님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 새댁이라는 말이 생경해서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만큼 나이에 수를 더하고 보니, 내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 절로 수긍이 된다.

   여자 오십 대는 새댁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낙의 인생에서 또 다른 일을 생각해볼 수 있는 하프타임이다.

   아이를 낳고 가족을 위해 보냈던 일상에서 조금씩은 놓여나 자신의 생을 돌아볼 수 있는 시기가 오십 대다. 무엇보다도 제2의 인생을 계획하기엔 더없이 좋은 때이다. 본인이 좋아하는 취미를 살려 전문가도 될 수 있고, 못 이룬 꿈을 향해 다시 공부해 볼 수도 있는 나이, 백세를 바라보는 이 시대에 인생 이모작을 계획하기에는 더없이 적절한 나이다.

   산을 타는 동호인 중에 남도소리를 잘 부르는 친구가 있었다. 노랫가락, 성주풀이, 선 시조까지 부지런히 배우러 다니더니, 지금은 강사가 되어 문화센터에서 제자들을 가르친다.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같은 연배 제자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산다.

   나 역시 오십 중반에 글공부를 시작했다. 막내가 입시공부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 미루었던 수필공부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집을 나설 때는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기쁘고 생활에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그때 만난 문우들과 글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지금은 분에 넘쳐 고맙다. 그뿐만이 아니라 독서지도 수료증을 따고 초등생 책 읽기 지도를 할 때는 나름 보람도 컸다. 어느 분야든 삼 년을 배우면 귀가 열리고 빠르면 오 년, 늦어도 십 년이면 그 일에서 전문가가 되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요즘은 자기 관리를 잘하는 시대여서 그런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주름살도 없고 젊기만 한 오십 대, 그들을 보면 나도 ‘아직은 새댁이네!’ 하는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온다.

   이른 아침, 계속되는 장맛비가 조금 멈추었다. 인근에 있는 구름산으로 산책하러 나갔는데 빗방울이 또 떨어진다. 산 중턱에 있는 정자 안으로 들어섰는데, 팔순을 넘긴 어른 두 분이 나를 보더니 불현듯 나이를 묻는다.

  “육십 끝자락인데요.”

  “그 나이만 됐어도 좋겠네.”하며 웃으신다.

   하긴 십 년 후에 나도 그 말을 또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아직은 새댁이네!’ 라는 말을 들으며 활기차던 그 오십 대가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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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