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여기 오페라 하우스예요. 지금 출발하세요.”
“그래, 알았다.” 나는 서둘러 서초동에 있는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신년 뮤지컬, 바리- 잊혀진 자장가.’라고 쓰인 현수막이 극장외벽에 걸려있다. 나는 딸의 안내로 객석에 앉았다. 조각과를 나와 무대미술2년 과정을 마치고 제작팀과 함께 한 작품 ‘바리데기’ 공연이다.
“ 무대 장치를 잘 보세요. 특히 2부에서는 볼거리가 많아요.”
팜플랫 속에 조그맣게 나와 있는 딸에 이름을 발견하고 나는 코끝이 찡해왔다. 극장을 울리는 음악과 함께 웅장한 무대가 열렸다. 커다란 고분을 연상케 하는 왕궁이다. 녹슨 청동거울은 미로를 상징하는 것으로 조상과 만나는 통로란다. 바리공주는 전래의 바리데기, 아버지 오구왕이 병이 들자 생명수가 있다는 저승을 찾아 천신만고 끝에 신령의 물을 얻어 아버지를 살리는 줄거리다. 바리는 착한 마음과 아버지를 구한 효성심으로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 일면 ‘오구풀이’ 로도 부리며 전국으로 전승되는 사설 무가이다. 오늘의 어려운 현실과 접목하여 버려진 자가 구원하는 희망의 세상, 신년벽두에 주인공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계기로 삼고 싶어 만들었다는 당장의 해설이다.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하나 둘 등장한다. 화려한 조명과 감미로운 음향, 이야기가 전개될 때마다 큰 무대가 아래로 사라졌다가 다시 올라오고 빙그르르 돌면서 상황이 바뀐다. 기울어가는 왕궁과 폐허의 도시는 암울한 회색과 진 밤색으로 표현하였다. 2막에 쏟아지는 폭포아래 방망이질을 하는 바리공주, 그 장면은 마치 떨어지는 물방울이 곧바로 튀어 오를 듯 리얼하다. 생명수가 있는 서천 땅, 이슬을 머금은 숲 속에는 영롱한 옥 바위가 서있고 삼천년 만에 열려서 득도한 사람만 먹는다는 천도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무대는 참으로 웅장했다. 바위 길이가 9m 가 넘어서 작업이 어려웠다고 하더니 왕궁이며 암벽을 어찌 만들었는지, 생각했던 것 보다 어려운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막이 오를 무렵, 감기가 들더니 계속 기침을 하며 다닌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찰흙으로 만들기 과제였다. 연꽃 잎 위에 청개구리가 앉아 있었다. 물감으로 색칠까지 하여 모양새가 어찌나 정교하던지 우리 내외는 놀라고 있었다.
“ 우리 딸 재주가 있구나.” 아빠의 말이다.
순한 줄만 알았던 그 꼬마가 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부터였다. 관심이 있는 놀이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조르기 시작하면 해결될 때까지 고집을 부렸다. 회초리를 들기도 여러 번이었다. 도망이라도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조그만 입을 꼭 다물고 피하지를 않아 끝내 엄마를 울렸던 아이, 그러나 자라면서 그 고집은 심심치 않게 상장과 상패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대학 입시를 앞에 놓고 교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끝내 조각과를 지망했고 나는 또 딸아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조각전에서 입상을 한 것도 그 무렵이다. 한참 예쁘게 꾸밀 나이에 옷차림은 물감 칠에 왁스, 언제나 먼지투성이다. 여자아이가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분야를 스스로 구축해 가기엔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무대 미술 2년 과정을 자기 힘으로 해결했으니 공부하랴 일하랴 미처 씻지도 못하고 곯아 떨어졌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자식도 키워보면 제각기다. 재능도 있고 하고자하는 열의도 확고한 아이를 시원하게 밀어주지 못하는 것이 나는 늘 미안했다. 그러나 묵묵히 자기 길을 가고 있었다. 그것은 과묵한 아빠의 성격을 닮은 것 같았다. 바리 작품 끝내고 소극장 무대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삼월에 막을 올린단다. 이제 무대 미술 책임자로 첫출발이다. 높은 콧대만큼 주장도 신념도 확실해 잘 해내리라 믿는다.
“경제적으로 밀어주지 못해 미안 하구나.”
“엄마, 환경이 좋았다면 열심히 안했을지도 몰라요.”
하긴 너희들이 없었다면 난들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이번 공연에 거의 한달을 매달리고 곤하게 잠이 들었다. 손을 만져보니 굳은 살 투 성이다. 꼬마 때 그 솜씨가 무대를 꾸밀 줄이야, 미술과 무대를 총괄하는 종합 예술가, 그리고 더 큰 세계로 나가 공부하는 꿈을 키운다. ‘ 네 꿈을 이루어 내리라 엄마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큰 딸 힘 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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